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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다음 블로그에 정리했던 이야기를 옮겨 오고 있습니다. 워낙 오래 전이라 용어와 표현이 최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일단 그대로 옮겨오도록 하겠습니다.)
1944년 여름, 제12 무장친위대 히틀러유겐트SS Hitlerjugend 기갑사단이 강력한 연합군의 공세에 맞서다.
노르망디에서의 결정적이면서도 끔찍한 전투가 몇 시간 밖에 안남은 지금, 제25 SS 기갑척탄병Panzergrenadier 연대의 몇 안되는 고참병들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변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10대의 신병들이 제 역할을 해주어야만 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신병은 반가운 존재였지만 너무 어렸다. 1대대의 경우 65%가 18살도 안된 어린애들이었다. 3%만이 25세를 넘겼는데 그것도 하사관이나 위관들이었다. 제12 SS 히틀러 유겐트 사단은 벨기에 안트워프Antwerp에서 편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25연대는 제1 SS 기갑사단Panzer Division, 국방군 그리고 공군Luftwaffe에서 차출된 고참병사들이 많은 편이었다.
팔레스 포켓에서 융단폭격에 걸린 기갑 교도사단
(우에스기 왈: 여기에서 SS 기갑사단은 뭐고 국방군은 뭐야 하는 분이 있을 텐데, 대전 당시의 독일육군은 무장친위대-Waffen SS와 독일국방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독일국방군은 히틀러와 당이 아닌 독일국가와 국민에게 충성하는 전통적인 육군이고, 무장친위대는 히틀러를 비롯한 나찌 당-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무력시위를 담당하던 무장호위단체로 출발했다가 정규군대로까지 진화한 육군이다.
히틀러의 친위부대이니 종교전쟁에서의 광신도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성격을 보이며 훈련과 무기를 최우선으로 보급받은 정예부대입니다. 전후 국방군은 전쟁포로로서의 대우를 받은 반면에 무장친위대는 범죄자 취급을 받았으며 지금도 일본과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범죄자로 낙인찍혀 있습니다. 대전 당시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호감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고, 우리나라도 일부 몰지각한 출판사의 영향으로 무장친위대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인으로는 전투력과 의지는 높이 살만 하지만 군인이기에 앞서 인간이기에 범죄자입니다. 그리고 히틀러유겐트 소년병들의 처절한 전투에 대해 잘 기억하시고 가장 마지막 반전을 꼭 확인하시길. )
2차대전 당시 독일 무장친위대와 독일국방군의 계급체계
가장 상위의 계급장은 히틀러의 것입니다.
일본자료여서 상급조장(주임원사), 조장(상사), 하급조장(중사), 군조(중사), 오장(하사), 평장(병장)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중요한 것 아니니까 외우지 마세요. 이런 것 외우고 자랑하는 초마이크로쫀쫀이 역사스토커들이 있는데, 이거 외울 시간이면 차라리 팔굽혀펴기하시고 창밖을 보면서 커피 한 잔 마시세요.
25연대의 대부분 병력은 히틀러 청년지도자 양성학교(Hitler Youth) 학생들이었는데 16살짜리 어린애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한 고참병사는 “저 너머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어린 척탄병들은 웃음을 띄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도 없이 확신이 가득했고 타고난 병사처럼 보였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이 어린애들이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라고 회상했다.
4호 전차 앞에 선 소년병들
6월 6일 연합군의 상륙이 처음 보고된 지 16시간 만에, 쿠르트 마이어Kurt Meyer대령은 연합군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렇지만 독일 사령부는 연합군이 교란작전으로 상륙한 것인지, 정식작전이라면 그 규모가 얼마인지를 전혀 알 지 못했기 때문에 기갑사단의 반격은 그만큼 늦어졌다. 결국 파리에 주둔해 있던 12사단의 제25 연대가 가장 먼저 작전지역에 도착한다.
1944년 6월 6일 오후 5시, 225대의 전차와 돌격포, 658대의 장갑차, 2,000대의 차량 그리고 20,540명의 사단병력이 3개의 경로를 따라 이동한다. 헬무트 포크Helmut Pock상사는 소년병들을 전선으로 데리고 가면서 “이제 토미(영국군)에게 한 방 먹여줄거다”라고 농담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사기는 높았는데, 많은 소년병들이 긴장감 때문에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우에스기 왈: 위와 같은 전력이 독일군의 평균전력이라고 절대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히틀러유겐트는 가장 먼저 보급을 받는 무장친위대였고 보통 독일국가명이나 히틀러의 이름이 들어가는 사단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고 후방에서 편재되어 전투를 한 번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막대한 전력을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만신창이로 두들겨맞고 있던 동부전선의 국방군 사단같은 경우에는 사단 병력이 8,000명도 넘지 못했습니다.)
4호 중(中)전차를 몰던 포크는 병목지점에서 속도가 크게 늦어졌고, 천천히 전진하는 동안 전차병들을 응원하는 보병들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전선에 가까워지면서 병사들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연합군의 폭격전투기의 공습을 받은 수 많은 차량들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습으로 인한 손실이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지만 잔해가 길 곳곳을 막고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많이 지체된 사단의 전진속도를 더욱 늦어졌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겨우 3분의 1 정도의 병력만이 캉Caen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결지에 도착한 마이어는 어떤 상황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716 보병사단 사령부를 찾으려고 했지만 모든 통신이 단절된 상태여서 아무도 사령부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불붙은 트럭들 사이를 간신히 빠져나와 연대로 돌아가면서 “캉은 전역이 불타고 있었다.”라고 회상한다.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거의 10개의 연합군 사단병력이 7개의, 그러나 이미 조각나서 전력이 크게 약화된 독일 사단을 공격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한시가 급한 상황에 병력도 제대로 집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병력이 도착하는 대로 마구잡이로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참상에도 마이어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아침이면 저놈의 작은 물고기들을 바다에 다시 처넣을 수 있을 거다.”
연합군 측에서는, 제3 영국군 사단이 21 기갑사단의 반격으로 생긴 제3 캐나다군 사단과의 틈을 메우라는 명령은 받는다. 이와 동시에 3 캐나다군 사단은 카르피케Carpique 공항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대서양 방어를 명령받은 B집단군Army Group은 이제 제12 SS 사단의 전투단Kampfgruppe과 21 기갑사단의 일부만 긁어모아 연합군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도록 반격할 계획이었다. 마이어에게는 3개 기갑척탄병 대대, 2개 전차중대 그리고 약간의 야포를 가지고 있었는데, 제21 기갑사단이 자신의 오른쪽을 담당할 것이라고 들었다.
아르덴 수도원의 종탑에서 캐나다군의 전진을 지켜보던 마이어는 성공적으로 반격할 기회를 찾아냈다. 6월 7일 오전 10시, 제2 대대의 4호전차 50대가 도착해서 자리를 잡았지만 가장 강력한 5호전차 팬저 대대는 연료문제 때문에 오른Orne 강 동쪽에서 출발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캉 공방전.
캐나다군은 줄을 지어 계속 전진했다. 프랑크빌Franqueville의 남쪽 산등성이에 도착한 캐나다군의 선두전차가 전진준비를 막 끝낸 마이어의 전차중대를 발견하는 순간, 마이어가 소년병들에게 전투명령을 내렸다.
제12 SS 사단이 선제공격에 나서면서 그르릉거리는 엔진과 덜컥거리는 트랙소리가 울려퍼졌다. 한 독일군 병사는 “프랑크빌 주변이 쿵소리와 번쩍이는 섬광으로 가득했다. 선두전차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승무원이 탈출하는 모습을 봤다. 다른 전차들도 산산조각이 났다. 한 대의 4호전차가 갑자기 멈추더니 포신에서 불을 뿜었다”라고 회상한다.
마이어의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캐나다군은 오티Autie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이어의 3대대는 끈질기게 뒤를 쫓아 한 번의 공격으로 오티와 프랑크빌을 제압했다. 다음 목표는 북쪽으로 1km 떨어진 뷔롱Buron이다. 마이어는 “적은 완전히 기습당한 것으로 보인다. 대전차포가 단 한 발도 발사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이어의 전차부대는 굉음을 내며 뷔롱으로 향했을 때에는 캐나다군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캐나다군의 대전차포가 4~5대의 전차를 파괴시켰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히틀러유겐트의 미숙한 기동이 그대로 드러났다. 한스 펜Hans Fenn의 전차도 한 방 맞았다.
그는 “포탄이 전차장의 다리를 잘라버렸는데, 나중에 그가 전차에서 빠져나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철갑탄을 맞은 전차에서 불길이 솟았다. 전차를 잃은 나는…. 3도 화살을 입은 채로 걸어서 귀대를 했는데, 전선으로 가던 전우들이 마치 유령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라고 회상한다. 기갑척탄병 부대는 뷔롱까지 전진했지만 캐나다군의 반격에 곧바로 밀려났다.
마이어는 공세가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캐나다군은 기습을 당한 충격에서 벗어나 독일군의 진격로에 엄청난 포격을 퍼부었다. 마이어는 전차병들에게 다시 공격을 재개할 것을 명령하고, 제1, 2 대대가 캄브Cambes 근처까지 전진시킨다.
에밀 베르너는 “캄브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마을은 평상시처럼 보였는데, 우리가 외곽에 접근하자 마자 적의 사격이 쏟아지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라고 기억한다. 두 명이 즉사했지만 전차병은 적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몰랐다. 전방에 어떤 적이 있는 지를 모르고 지원부대와 연락도 안되었기 때문에, 대대장은 방어태세로 전환한다. 한시가 급한데도 제21 기갑 사단이 전혀 전진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대의 우측이 그대로 연합군의 전차부대에 노출된 것을 안 마이어는 경악했다.
적의 맹렬한 반격을 받은 12연대의 소년병들은 전혀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중대장은 말을 안듣는 소년병 때문에 거꾸로 애를 먹었는데 “모두 바다까지 진격하고 싶어했다. 그 녀석들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후퇴하라는 명령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한참 후에나 후퇴할 수 있었다”라고 회상한다.
그 날 저녁, 제26 SS 기갑척탄병 연대가 도착해서 퓌토Putot로 진격해 들어갔지만 제7 캐나다군 여단의 반격을 받고 물러났다. 독일군도 연합군도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한 채 마을을 사이에 두고 소모전을 펼치게 되었다.
6월 8일 드디어 팬저전차 중대가 모습을 나타내자, 마이어는 라츠Rots의 마을에 대한 야간공격을 직접 지휘한다. 그러나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혼전 끝에, 독일군은 6대의 전차를 잃고 후퇴한다. 독일군의 의지와 용기는 연합군보다 훨씬 강했지만 병력을 모으지 못하고 순차적으로 투입할 수 밖에 없었기에 손 안에 든 기회를 확실히 잡지 못한다.
팬저 마이어라는 별명을 가진 쿠르트 마이어. 패주하는 독일군을 막아서서 나를 버릴 것인가라는 호소 한 번으로 전선을 복구시켰습니다.
연합군을 바다로 몰아내기 위해, 독일군은 6월 10일에 제12 SS, 제21 기갑과 교도 기갑Panzer Lehr사단을 모두 동원한 대규모 공격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공격을 시작하기 직전에 연합군이 먼저 기선을 잡고 교도 기갑사단의 왼쪽을 찌른다.
양쪽에서 계속 병력을 투입해 서로에게 반격에 나서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사상자만 늘어간다. 6월 16일, 캉의 남서쪽 27km 지점에 있던 제12 사단 사령부가 함포사격을 받아 프리츠 비트Fritz Witt준장과 다른 영관장교가 모두 사망하고 마이어가 사단장으로 승진한다.
연합군의 공세로 캉 수비선이 점차 좁혀 들면서 제12 사단은 이제 캉의 북쪽과 서쪽에 병력을 나누어 방어에 나서게 되는데 북쪽에서는 별 도움이 안되는 제16 독일공군 야전 사단이 합류했고, 서쪽에서는 제26 SS 기갑척탄병 연대의 제1 대대가 15대의 전차와 함께 12사단을 도와 카르피케 공항을 방어하고 있었다.
영국군 제21 집단군 사령관인 버나드 로 몽고메리Sir Bernard Law Montgomery장군은 독일군을 캉에서 한꺼번에 몰아내기 위한 대공세를 펼치기 시작한다. 캉을 수복하면 독일군 기갑병력의 대부분이 연합군의 선봉부대의 동쪽으로 몰려나 서쪽의 미군이 서쪽에서 돌파할 기회가 생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첫 번째 작전이 6월 26일에 시작된 엡솜Epsom 작전으로 카르피케 공항 남쪽의 112고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마이어의 소년병들은 참호에 틀어박혀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지만 700문의 야포지원을 등에 엎은 3개 사단과 2개 기갑여단의 공격 앞에서는 방어선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어떤 독일군은 엄청난 포화를 피해 땅에 엎드렸다가 일어나니 주변이 온통 수류탄을 던져대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이었다고 할 정도로 혼전이 벌어졌고 영국군은 제12 사단 소년병들의 광적인 반격을 막아내며 남쪽으로 천천히 전선을 밀고 내려왔다.
독일군은 이제 마지막 남은 예비부대를 투입해 연합군을 막아내려고 하지만, 6월 27일 영국군의 진격이 다시 시작된다. 영연방 병사들은 28일에 112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독일군의 광적인 저항이 계속되면서 3km 정도의 폭으로 7km 정도만 간신히 뚫은 연합군의 진출로는 독일군의 반격을 받게 되면 후방이 단절될 위험이 있었다.
이런 기회를 알고 있는 독일군은 29일 늦은 오후에 제12 SS 사단을 포함한 6개 기갑사단의 잔여병력을 동원해 반격에 나서지만 영국군 역시 물러나지 않고 버텨냈다. 반격을 지휘했던 파울 하우저Paul Hausser장군은 “해협에 있던 전함의 엄청난 포화와 영국군의 야포가 아군의 집결지를 때려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병의 근접지원을 받지 못한 독일군 전차들은 근거리에서 노리는 보병의 대전차 무기에 하나 둘씩 파괴되었다.
함포를 맞은 3호 돌격포. 타이거도 함포를 맞으면 뒤집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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