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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영국군 매관매직에 대해 정리하면서 그냥 영국군 특집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영국해군의 럼 이야기 - 넬슨의 피
약 200년 동안, 바다에 나간 영국선원은 매일 럼주Rum(이하 럼)를 배급받았다. 그리고 그 200년 동안 럼은 해군의 문제거리를 해결해주었고 그 효과가 완전히 사라진 1970년까지 배급되었다.
영국해군은 윌리엄 펜 제독이 스페인령의 자메이카를 침공해 점령하던 1655년 5월에 처음으로 럼을 맛봤다. 카리비안과 자메이카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던 스페인은 사탕제조 과정에서 나온 수수펄프를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모아서 증류해 럼을 만들었고 라틴어 설탕의 단어 중 일부를 따서 Rum이라고 불렀다.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스페인 사람이 럼이라고 부르는 것을 따라 불렀다는 것이 유력하다.
탐험시대 이전에는 대양을 항해하는 배도 작고 선원도 적었다. 미국,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향하는 항로가 열리면서 배 크기와 선원 수가 커졌고 다음 목적지에서 물과 식략을 보충할 때까지 몇 주를 항해했다. 전함은 훨씬 크고 복잡했는데, 특히 전열함은 선원의 수가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아져서 보급품 창고공간이 골치아픈 문제거리였다.
그 중에서도 식수보관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나무통 안의 물은 며칠 만에 이끼가 끼고 불순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몇 주만 지나면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었다.
오래된 식수는 맥주와 타서 먹었는데 상온의 맥주는 금방 시어졌고 오히려 물보다 더 빨리 변질되었다. 다양한 술과 섞어보는 시도가 잇달았다. 브랜디가 가장 좋았지만 프랑스가 영국으로 수출할 리가 없었다. 동인도회사의 해군과 상선은 쌀로 만든 술을 섞어서 마셨다. 그렇지만 영국선원은 럼을 가장 선호했다.
럼은 맥주보다 보관공간이 적었고 더 오래 향취를 지속해서 긴 항해에 알맞았다. 무엇보다 럼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해군이 처음부터 럼을 배급하지는 않았다. 럼배급을 정책으로 정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럼과 물 혼합비율을 수없이 시험했다. 어떤 배는 5:1로 섞었고 다른 배는 럼 그대로 먹었다.
선원부족으로 강제 징병하거나 죄수를 동원하다 보니 선원의 일탈이 잦았다. 일부 선원은 럼을 훔치거나 다른 선원의 몫을 빼앗았다. '럼 쥐'라고 불리는 도둑을 피해, 럼은 배의 은밀한 곳에 보관되기 시작했고 경비병은 필수였다.
럼배급 규칙은 1740년에 정해졌다. 1739년, 에드워드 버논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카리비안해로 가서 스페인령의 포토 벨로Porto Bello를 빼앗았다. 그 후에 버논 함대는 예정보다 길게 주둔하게 되었고 병사들은 럼을 몰래 반입해서 만취하고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
버논은 럼을 희석시켜 배급하라고 지시했다. 저장통에 담긴 물을 양동이에 부어 냄새를 없앤 후에 설탕과 라임쥬스를 넣었다. 모든 선원이 보는 자리에서 사무장이 럼을 물로 희석한 후에 한 명에게 매일 두 차례씩 0.5리터의 럼 희석주를 배급했다.
해군성은 이후 50년 후까지도 괴혈병처방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버논은 럼에 라임쥬스를 섞어서 자연스럽게 괴혈병 문제를 해결했다.
선원은 보통 모든 것에 별명을 붙이는데 영국수병은 럼 라임쥬스를 마신다고 해서 라이미Limey로, 버논 제독의 희석주는 그로그Grog (사진 중간의 술통)라는 별명이 붙었다. 버논이 좋아하던 외투형태, 그로그럼Grogram에서 따온 별명이었다.
그의 별명은 그렇게 영국역사에 남았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전세계 영국선원이 그로그를 배급받았다. 특히 선원이 배급을 받을 때에는 모자를 벗었기 때문에 해군성은 영국 군주에게 바치 축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그로그 통에는 "신이여, 왕을 축복하소서"라는 동판을 붙였다.
장교들은 늘 취해있는 선원에 대해 불평을 하면서 배급량을 줄일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코 앞이었고 해군성은 그렇지 않아도 고된 선원의 불만을 일부러 사고 싶지 않았다. 영국해군은 프랑스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기다리며 프랑스 항구 밖에서 끊임없이 기동하며 경계를 해야 했다. 럼은 일반선원이 위안을 얻는 유일한 낙이며 럼배급을 줄이면 급여를 올려주어야 할텐데 해군성은 그럴 자금이 없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그로그 역사에 희한한 기록을 남겼다. 허레이쇼 넬슨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하자, 본토로 옮겨 매장해야했다. 항해 중에 썪지 않도록 브랜디 통에 넣어 옮겼는데 실제로는 럼에 담궈서 옮겼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로그는 '넬슨의 피'라는 별명이 붙었다.
평화가 찾아오면서 영국해군의 규모는 크게 줄어들었다. 수병은 대량해고당했고 선박은 해체되었다. 1824년, 해군성은 결국 럼 배급을 50%로 줄였고 대신 고기량을 좀 더 늘렸다. 재미있게도 대영제국이 새로운 도량법을 적용하면서 럼 배급은 20% 다시 늘어났다.
아무리 50%로 줄였다고 해도 상당한 양이었고 지금의 더블 위스키 4잔(술을 안 먹으니, 맞는 소리인 지 모르겠군요)에 해당했다.
1830년, 럼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영국해군뿐만 아니라 영연방과 미해군에서도 배급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럼 배급이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금주선원은 동료에게 자신의 몫을 주었고 술주정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몫보다 더 많은 양을 마셨다. 배위와 육지 모두에서 만취한 선원이 문제를 일으켰다.
1850년, 럼 배급은 다시 50%로 줄어들었고 급여, 고기와 설탕량이 늘어났다. 금주선원에게는 돈을 지급했다. 그리고 배급 시간도 저녁시간으로 옮겨서 빈 속에 술을 먹지 못하게 했다.
러시아와의 크림전쟁에서는 고민거리를 안겨며 육군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상대할 함대가 없었기 때문에 적진지에 포격만 했고 수병은 해병대 훈련을 받은 후에 육상전투에 투입되었다. 수병은 육지에서도 럼을 배급받았는데 크림반도의 추운 겨울이 오자, 군은 육군병사들에게도 럼을 배급했다. 수송선을 타고 오던 육군도 럼 배급을 받았다.
당시는 모든 부문에서 개혁이 일어나던 빅토리아 시대였고, 럼 배급은 당연히 절제운동의 비난을 받았다.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미국은 1862년에 럼 배급을 중지시켰다. 영국의 절제운동이 절정에 달했지만 해군성은 럼 배급중단 명령을 거부했다. 독일과의 전쟁이 불거지면서 해군성은 수병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어떤 개혁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20세기 초가 되자 정확한 데이터가 집계되고 기록되기 시작했다. 88,000명의 선원이 럼 배급을 받을 수 있었고 77,000명이 그 혜택을 누렸다. 1차대전 당시의 해전 대부분은 북해에서 일어났는데 럼은 한기와 습기를 견디는 처방이었다.
그 동안 럼 배급은 평화시에 주로 변경되었는데, 해군성은 1, 2차대전 중간에 물과 술을 2:1로 희석하도록 결정했다. 독립적이던 잠수함 선원은 1:1 희석을 그대로 가져갔다.
절제운동에서도 살아남은 럼 배급은 2차대전에서 큰 위기를 맞았다. 독일 폭격기가 런던을 폭격하던 중에 약 95만 리터의 희석된 럼이 파괴되었다. U보트는 엄청난 양의 럼을 바다속으로 가라앉혔다.
홍콩에서는 일본군이 접근하자 모든 럼을 바다에 던져 폐기시켰다. 독일 아프리카군단이 영국 방어선을 돌파하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해군성은 어쩔 수 없이 남아프리카 나탈이나 쿠바에서 럼을 구입했지만 맛이 완전히 달라진 럼을 병사들은 반기지 않았다.
존폐위기에 있던 럼 배급은 현대식 기계가 갑판 위와 아래의 고된 작업을 대신하면서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제트기, 원자탄, 미사일과 전자장비를 다루는 병사는 고도의 집중력이 기울여야 했고 아무리 전통을 사랑하는 해군성이라고 해도 더 이상 럼 배급을 할 수 없었다. 사실 럼은 이미 그 필요성이 사라진 지가 오래였다.
1970년 7월 31일, 영국해군 모두는 마지막 럼 배급을 즐겼다. 이번에는 연금펀드가 보상이었다. 이제 영국해군에서는 더 이상 넬슨의 피를 마실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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