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링크
본문
나가시노 전투는 영화 가게무샤(影武者)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전투로 한 때 일본 전체를 공포에 떨게했던 다케다 가문이 몰락한 결정적인 전투입니다.
가게무샤를 보셨지만 당시 역사배경때문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한 분이라면 이번 이야기가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가게무샤 포스터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두 장의 포스터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에는 장대한 스케일의 대전투 장면을 기대하고 '어머 이건 질러야 돼!'라고 어렵게 구했었는데 그냥 다케다 가문의 드라마이더군요.
먼저 나가시노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의 간단한 배경 설명을 해야겠죠? 너무 복잡하고 긴 내용이니까 여기서는 아주 짧게 요약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 블로그를 참조해주세요.
중앙정부 역할을 했던 막부(쇼군)가 계승문제로 내전(1467년, 오닌의 란)이 벌어지고 11년에 걸쳐 지방 영주(다이묘)들이 편을 갈라 뛰어들면서 막부정치는 크게 흔들리게 되고 지방 영주들이 독립하면서 군소 영주들을 합병 또는 동맹을 맺는 대혼란의 전국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전국시대에 이름을 떨쳤던 주요 다이묘들과 영지입니다.
가게무샤 그리고 나가시노 전투의 무대는 바로 일본 중남부의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케다 신겐의 삼각구도입니다.
일본의 조조라고 불릴만큼의 지략과 카리스마가 뛰어난 다케다 신겐이었지만, 하늘은 반드시 맞수를 붙여놓는다는 재미있는 역사의 징크스처럼 바로 등 뒤에 일본 최고의 무장 우에스기 겐신이 자리를 잡는 바람에 평야지대인 남부와 수도인 교토로의 진출이 늦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우에스기 겐신을 젊은 애숭이로만 알고 힘과 모략으로 제압하려고 했지만 몇 차례의 전투에서 '이 놈은 뭔가 다르다. 우리가 먼저 죽겠다'라고 생각한 신겐은 더 이상의 북진은 포기하고 대신 남진을 선택하게 됩니다.
우에스기 겐신의 영지에 반란을 획책하고 다른 다이묘가 견제하게 만들고 나서야 남진을 시작하는데,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눈 앞을 지나 유유히 행군을 합니다.
당시까지 패배를 몰랐고 너무 젊었던 이에야스는 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을 나서 다케다 군을 공격하지만 순식간에 전멸직전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도망쳐옵니다.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미카타가하라 전투(1572)로 이에야스가 얼마나 놀랐던지 말 위에서 똥을 지리고 도망쳐왔을 정도였습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몰골을 잊지 않기 위해 화가를 불러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바로 이 그림입니다.
지난 번 공성전에 이어 이번에도 똥이 등장하는군요 ㅡ.ㅡ
이에야스의 전력을 완전히 박살낸 다케다 군이 (당시에는 힘이 약했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진격해야 하는데 왠 일인지 며칠 숙영지에서 조용히 있더니만 갑자기 진영을 거두고 영지로 돌아가버립니다.
사지에 몰린 이에야스 뿐만 아니라 디아블로급 보스를 만나게 된 노부나가도 '늙은 너구리가 또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구나'하며 진도개 하나를 계속 발령하고 있었는데 다케다 신겐이 사망했다는 정보가 입수됩니다.
하늘의 심술로 일본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케다 신겐이 아래 그림처럼 전멸직전에 몰린 이에야스 성에서 벌이는 마지막 잔치의 음악소리에 끌려 진영 밖에 나왔다가 저격당해 죽었다는 설이 많지만, 실제로는 지병이 악화되어 급히 영지로 돌아가 죽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신겐이 저격당하는 그림입니다.
다케다 가문을 넘겨받은 가쓰요리도 상당한 무장이었고 일본 최고의 다케다 가문 24 무장은 그대로 충성했기 때문에 마치 삼성가를 물려받은 꼬니같이 환경은 좋았는데, 중신들이 말끝마다 '선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겐신 공이라면 그러지 않을 겁니다'라며 가쓰요리의 자존심을 긁어댔습니다.
일본 최고의 가신단인 다케다 24무장의 그림입니다.
이렇게 나선 것이 바로 1575년 나가시노 전투가 벌어지게 된 원정입니다.
제 블로그에서는 영어자료 그대로 올리지만, DP를 위해서 이번에는 최대한 한글번역했습니다.
다케다 가쓰요리가 최후로 나선 원정로입니다.
그러나 가쓰요리가 다케다 전 병력의 절반인 15,000명을 데리고 진군하던 중에, 음모가 발각되어 오카자키 성의 수비는 더욱 단단해졌고, 가쓰요리는 적당한 목표를 찾아 계속 남진하게 됩니다.
반란을 꾸민 오가 야시로는 대나무 톱으로 목이 썰리는 사형을 당했는데... 좀 더 잔인하게 길 한 복판에 목만 내놓고 파묻은 다음에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톱으로 한 번씩 썰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욕은 해도 직접 행동에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7일 동안 그 상태로 살아있었다고 하는군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거성을 바로 함락시키려던 작전이 어긋난 다케다 가쓰요리는 남동진을 하며 적당한 목표를 찾게 됩니다. 니렝키와 우시쿠보라는 작은 성을 불태운 후에 요시다 성을 공격하려고 하지만, 다케다 군의 진격로를 미리 알아챈 이에야스가 6,000명의 병력을 성 안에 들여보냅니다.
다케다의 유명한 24무장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60세의 노장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성 앞으로 홀로 나가 자극을 시키고 이에야스의 무장 34명이 나가 일대 격전이 벌어집니다.
당시 60세였으면 상당한 고령이었는데도 마사카게는 훌륭하게 창술을 선보이며 맞섰고, 미카타가하라에서 다케다 군의 유인에 걸려 성 밖에 나섰다가 저승문턱까지 갔던 이에야스는 급히 병력을 성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보통 성을 공격하려면 최소 5배의 병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쓰요리는 요시다 성을 떠나 귀국 길에 오릅니다. 그런데 이대로 귀국하기에는 체면이 안 서고 그렇다고 전략요충지를 공략하기에는 이미 이에야스의 주력이 따라다니고 있어서 어려움이 있던 차에 마지막 목표로 선택된 것이 바로 나가시노 성이었습니다. 나가시노 성은 가쓰요리에게 다음과 같은 가치가 있었습니다.
- 산악지대인 다케다 가문이 남부로 진출할 수 있는 몇 개 안되는 길목 중 하나였습니다.
- 겨우 500명의 수비대만이 있어서 다케다 군이 5배가 아닌 30배의 병력입니다.
- 지휘관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다케다 가문을 배반한 무장으로 다케다 가문의 체면과도 연관이 있었습니다.
당시 전국시대에서는 전력이 압도적인 차이가 나면 지휘관 정도만 할복자살을 하고 나머지 병사는 후방으로 가는 협상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가쓰요리가 이걸 바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겨우 500명의 수비대가 일본 최강의 다케다 군의 발목을 잡는 것뿐만 아니라 큰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먼저 이에야스가 어릴 때부터 볼모로 잡히면서 가신들과 국민이 많은 고생을 해왔고 그것이 일종의 한으로 자리잡아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배반이 빈번했던 전국시대에 보기 드물게 충성과 집념이 강한 집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전향할 때에 볼모로 잡혀 있던 가족이 모두 사형당했기 때문에 이번 전투에 개인의 원한을 풀고 싶었습니다. 지휘관을 포함한 500명의 병사가 전멸을 각오했던 것입니다.
외부 방책 모두를 넘겨주고 본성에 간신히 의지하던 수비군이었지만 1,000명 정도의 다케다 군을 죽이며 조금도 사기가 떨어지지 않자, 가쓰요리는 화약과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합니다.
나가시노 성의 식량이 3일치 밖에 안남자, 도리이 수네에몬이라는 무장이 나서 엄중한 다케다 군의 포위망을 뚫고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게 구원요청을 합니다. 다케다 군에 비해 훨씬 많은 38,000명의 병력인 연합군은 다케다 군의 규모, 위치, 전략에 대해 알지 못하던 차에 수네에몬의 정보는 너무나도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일본 무사의 전설이 하나 탄생합니다. 연합군이 구원에 나서게 불러낸 수네에몬은 성으로 돌아가 반가운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 성 반대편에 봉화를 올려 구원군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린 수네에몬은 성으로 돌아가다가 붙잡히고 고문을 당합니다.
가쓰요리 : 네 용기를 높이 산다. 내 진영에 합류하지 않겠는가?
수네에몬 : 감사합니다. 기꺼이 합류하겠습니다.
가쓰요리 : 아예 공을 하나 세워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구원군이 이미 전멸해서 희망이 없다고 알리고 성문을 열게 해보겠나?
수네에몬 : 기꺼이 하겠습니다.
(성문 앞에 간)
수네에몬 : 엄청난 구원군이 오고 있다. 하루 이틀만 버티면 다케다 놈들은 끝장이다. 우리는 미카와의 무사임을 잊지 말아라.
도리이 수네에몬은 그 자리에서 창에 찔려 죽었지만, 그의 용기에 감동한 다케다 군의 한 대장은 아예 부대깃발로 만들었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연합군이 하루 거리에 온 것을 안 가쓰요리는 진영을 걷고 귀국해야 했는데도,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면대결을 결정하게 됩니다. 중신들은 나가시노 성을 총공격해서 무너뜨린 후에 성을 의지해 전투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가쓰요리는 다케다 군의 주력인 기마부대가 활약할 수 있는 들판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던 다케다 군에 대해 지난 3년 동안 대책을 연구해왔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화승총 3천 자루를 모두 가져왔고 병사들이 영지를 떠날 때부터 대나무를 져나르게 했습니다.
진영도 들판이 끝나는 개울 바로 앞부터 산 중턱까지 좌우로 넓게 펼쳤고 가져온 나무로 방책을 3중으로 쳤습니다. 그리고 병력 중 3,000명을 따로 떼어 별동대로 나가시노 성으로 보내 다케다 군의 배후로 돌게 합니다.
들판을 질주한 다케가 기마부대는 개울을 건너면서 죽은 속도가 언덕을 올라오며 완전히 죽어버려 화승총의 좋은 표적이 됩니다.
나가시노 전투에 대해 잘못 알려진 대표적인 오해가, 화승총 앞에 다케다 군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했고 순식간에 끝난 전투라고 알려진 것인데,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다케다 군이 10,000명, 연합군이 6,000명 이상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오전 6시부터 오후 2시 정도까지 8시간이 걸린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적은 수의 병력이 계속 공격을 퍼붓고 압도적인 병력이 방책 안에서 수비만 치중하는 희한한 전투가 벌어졌고 노부나가가 공들여 키운 화승총 부대의 3연사 전술이 대단한 활약을 합니다.
그러나 일본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했던 다케다 군이었기에, 방책 곳곳을 넘어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습니다.
나가시노 성으로 크게 우회한 3,000명의 별동대의 기습을 받은 다케다 포위 군은 궤멸되고, 나가시노 성의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성을 나서 200명의 다케다 군을 죽이면서 역사적인 나가시노 전투를 엔딩 크레딧(^^;)을 올립니다.
피해 숫자만 보면 다케다 군이 선전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케다 군은 이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영원히 복구하지 못합니다. 우선 다케다 군의 주력인 기마부대가 모두 전멸했고 다케다 군과 영지를 연결시켜 주는 이름있는 무장이 97명 중 54명이 전사했습니다.
영지로 돌아간 가쓰요리는 연합군의 침공을 걱정하며 7년 동안 잘 버티지만 1582년 연합군의 단 한 번의 공격에 싸움도 못해보고 가문이 멸망하고 맙니다. 가쓰요리에게 실망했던 중신과 영주들이 연합군의 회유에 성문을 모두 열었고, 심지어 자신의 친인척 무장에게까지 배신당해 깊은 산속에서 아내와 아들을 죽인 후에 목숨을 끊습니다.
댓글목록
|
재밌게잘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
잘봤습니다.
|
|
1521년이 맞습니다. 지도는 그냥 주요 다이묘의 위치입니다. |
|
안녕하세요 uesgi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