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링크
본문
Scorched Earth가 동부전선 후반전투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좋은 자료이지만, 워낙 오래 전에 쓰인 후에 교정과 보완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각 지역의 전투가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고 가끔씩 저자 자신도 일관성없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체르카시는 독일군이 부르던 포위망 이름이지만 이미 러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진 상태였고 정확한 지역은 러시아군이 불렀던 코르순입니다. 저자의 의도를 존중하기 위해 체르카시 전투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체르카시 전투의 분량이 많아서 2부에 걸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남부전선의 붕괴 체르카시 전투 1부
희망이 사라진 56,000명의 병사-즈베니고로드카에서 완성된 포위망-코네프의 값비싼 실수-구원군 리샨카 점령하다-239 고지의 운명-포위망 돌파까지 13km-"암호명 자유, 목표 리샨카, 23시"-지옥의 주르진챠와 포차핀치-군단 사령관의 전사-전투 대차대조표
코네프는 1월 25일에 공격을 시작했다. 엄청난 포격 후에 러시아 근위군이 돌격해 들어갔다. 리조프(Ryshov)의 제4 근위군이 돌파를 시도했지만 독일군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보병은 참호를 버리지 않았고 포병은 효율적인 포격으로 리조프의 병사들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막았다.
코네프는 계획했던 것보다 더 일찍 로트미스트로프(Rotmistrov)의 제5 근위전차군을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 전차군은 그 동안 많은 명성을 얻어왔지만 이번에는 운이 좋지 않았다. 독일군의 대전차포와 팬더전차의 정확한 사격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의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녁무렵이 되자 헤션(Hessian) 제389 보병사단의 우익이 기갑여단의 끈질긴 공격에 물러났다.
체르카시의 현재 위치입니다. 루마니아 국경까지 전선이 열려있고 크리미아 전선은 완전히 단절된 상태입니다.
전쟁의 신이 있다면 코네프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는 충분한 병력을 동원해 열린 틈을 공격해들어갔다. 스템머만(Stemmermann)은 2개 전차사단으로 더 이상의 침투를 허용하지 않고 전선을 다시 정비했다. 그리고는 여유가 생긴 바바리안 제57 보병사단으로 반격을 가했다.
전투의 초점은 좌익의 카피타노브카(Kapitanovka)였다. 1월 26일까지는 실레시안(Silesian) 제11과 중부 독일 제14 전차사단이 나름대로 선전을 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코네프는 극단적인 결정을 했고 보만(Vormann) 장군은 다음과 같이 그 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있다.
"러시아군은 피해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과장하려는 것이 아니고, 정오가 되자 러시아 대군이 독일군 전차의 저항을 무시하며 서쪽으로 내달렸다. 모든 병력을 총동원했다. 이전에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마치 댐이 무너져내려 엄청난 물이 저지대를 집어 삼키고 언덕 정도만이 모습을 드러내듯이, 전차를 둘러싼 소수의 척탄병이 러시아군의 공격 대열 중간 중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3개 기병사단 병력이 우리의 사격을 무시하고 밀집대형으로 참호를 넘어 후방으로 달려갔다. 마치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러시아 보병이 T-34를 따라 전진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보조장비도 없이 소총만 들고 뛰는 것을 보면 연출 사진으로 보입니다.
중간 사진은 러시아군의 전차 공격을 막아세운 독일 보병들이 전선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독일 전차병에게 악몽과도 같은 두 전차가 동시에 등장한 드문 사진입니다. 왼쪽은 85mm 장포신을 장비한 중장갑의 T-34입니다. 이 전차의 등장으로 T-34는 4호 전차에 비해 우위를, 타이거와 팬더에 대해서는 거의 비슷한 전투력을 보입니다.
왼쪽의 전차 일부만 보고도 "앗!"하시는 분은 상당한 지식이 있는 분입니다. 드디어 괴수사냥꾼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IS-2 전차입니다. 1943년 말부터 투입되기 시작해서 1944년 2월부터는 122mm 대구경포로 타이거와 팬더를 잡았다고 해서 괴수사냥꾼으로 불렸습니다. 러시아군은 이제 4호전차에 대해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타이거와 팬더에 대해서는 우위를 점하는 전차를 가지게 됩니다.
1~2km 밖에서 전차를 잡던 88mm 대전차포 조차도 중거리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파괴시키지 못할 정도였고 75mm 정도의 대전차포는 근거리가 아니면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사진은 부상병을 돌보고 있는 의료병입니다. 전쟁영화를 보면 미군은 Medic이라고 외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의외로 독일 의료병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카피타노프카에서 전선이 돌파당했는데 불행은 늘 친구를 데려오는 법이다. 1월 초부터 모든 야전지휘관들이, 키에프에서 벨라야 체르코프(Belaya Tserkov)를 통해 남동쪽으로 밀려들어오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크라브첸코(Kravchenko)의 제6 전차군을 포함한 3개 군이 독일군 돌출부 수비선 서쪽의 제7 군단의 얇은 방어선을 뚫었다.
바바리안 제88과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urttemberg) 제198 보병사단이 러시아 전차군을 가로 막고 나섰지만 바로 무너져 내렸고 전선에는 큰 구멍이 생겼다. 더 이상 투입할 예비병력도 없었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러시아군은 남동쪽으로 내려가 북서진하는 코네프의 병력과 연결하려고 했다.두 병력 간의 거리는 불과 100km 정도였고 기갑부대에게는 바로 옆이나 마찬가지였다. 러시아군이 서로 연결되면 카네프 돌출부에는 독일군 2개 군단이 갇히게 된다.
결국 두 병력이 연결되었고 크라브첸코와 로트미스트로프의 전차 승무원이 1월 28일 즈베니고로드카(Zvenigorodka)에서 만났다. 체르카시의 절망적인 전투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익힌 요리법을 이번에도 성공시켰다. 카네프 돌출부를 이중으로 포위해 드니에페르 강으로 이르는 모든 통로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독일군 6개 사단과 독립여단을 그 안에 가뒀다. 독일군 전선에는 100km 정도의 구멍이 생겼고 러시아군은 활짝 열린 전선을 통해 루마니아까지 무인지경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 사령부는 3주 전에 키로보그라드에서 보만의 42 전차군단과 제8군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놓쳤던 기회를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이 기회를 살릴 수 있을까?
“도대체 러시아놈들이 뭘 하려는거야?”
만슈타인은 1월 28일 우만에 모인 지휘관들에게 물었다.
“이대로 포위망을 압축하려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내달리겠다는건가?”
노보미르고로드(Novomirgorod)에 있던 보만도 참모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코네프는 이미 엄청난 대군을 정렬시켜놓고 있네. 포위망을 그대로 두고 가용병력 전부를 부그로 밀어붙이려는 것일까? 1942년에 예레멘코(Yeremenko)가 스탈린그라드를 그대로 두고 돈 강으로 갔던 것처럼?”
코르순 포위망 안에는 6.5개 사단이 갇히게 됩니다. 뒤늦게나마 히틀러의 최고사령부는 대반격전을 펼쳐 제3 전차군단이 포위망 10km 지점까지 진출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을 만나게 됩니다.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전선이 100km나 열려있고 앞은 독일군 수비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진격하는 것이 옳았다. 코네프와 주코프(Zhukov) 원수가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상황을 제대로 판단했다면 당연히 무조건 진격을 선택했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독일군의 절망적인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을까? 빨치산의 전설적인 역할을 절반만 사실로 받아들여도 러시아 최고사령부는 그들의 정보에 따라 올바른 상황판단을 했을 것이다. 빨치산이 아니더라도, 1월 28일부터는 야전 지휘관들이 포위망 후방의 시민들에게서 더 이상의 독일군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1941년 여름에는 러시아군이 지금의 독일군과 똑같은 상황에 몰렸었는데, 구데리안, 호트, 클라이스트는 대규모 포위작전을 펼쳐 러시아 서부에서 러시아군을 전멸시켰었다. 이번에는 독일군이 같은 운명이 될 것인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러시아군은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대규모 작전을 펼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왜 러시아 최고사령부와 코네프가 손 안에 들어온 1943-44 겨울전투를 흘려보내 독일군 남부전선을 한 번에 궤멸시키지 못했는지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독일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했던 것일까? 포위망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일까?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주코프와 코네프는 무려 6개 군, 나중에는 7개 군, 더군다나 러시아 최고의 2개 전차군과 여러 개의 독립 전차군단을 가지고 남부전선 전체가 아닌 독일군 6.5개 사단만을 노리고 덤벼들게 된다.
이렇게 엄청난 병력을 동원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러시아 최고사령부가 포위망 안에 갇힌 독일군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군은 포위망에 독일군 제8군, 특히 기갑부대와 사령부를 가뒀다고 믿었을 것이다. 2월 3일에 참모들끼리 주고 받은 대화를 보면 신빙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독일 제8군이 카네프에 갇혔다. 독일 국방군의 최정예 기계화사단 9개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 1개 사단과 기계화 여단을 가뒀다. 이제 스탈린그라드가 재현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참모들끼리만 그런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코네프에게도 그런 보고가 올라 갔고, 코네프는 “이번에는 제대로 해야지. 그 놈들이 이번에는 포위망을 빠져나가게 가만두지 않을거야.”라고 말했다. 코네프는 제8군의 전체 병력인 10.5개 사단과 사령부를 가뒀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100,000명의 독일군을 가뒀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코네프의 계산착오를 그대로 옮겨 적고 있는 자료들이 있다.
코네프가 착오를 일으킬만도 한 것이, 사단이라는 이름만 남은 3개 보병사단을 합쳐 군단 전투단 “B”라고 붙였고 제332, 255, 112 보병사단을 하나로 묶어 112 보병사단의 참모가 지휘하는 “사단 그룹”을 만들었다. 이리 뭉치고 저리 뭉쳐도 1개 사단의 전투력이었지만, 갑자기 늘어난 부대에 코네프가 착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수를 하게 된 또 다른 원인은, 포위망 안에 사단 전체가 아닌 연대급 병력이 많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168 보병사단의 417 기갑척탄병연대, 167 보병사단의 331 기갑척탄병연대, 14 전차사단의 108 전차척탄병연대, 213 지역방위사단과 323 보병사단의 스키대대가 사단 전체로 계산된 것이다. 이 부대의 포로를 심문하면서 전체 사단이 갇힌 것으로 계산했다.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러시아군은 새로운 스탈린그라드에 2개 군의 대부분 병력을 투입했다.
독일 수비군은 러시아군의 움직임이 너무 신중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1월 31일, 제42 전차군단의 감청분대는 러시아 공병 지휘관의 무선통신을 가로채는데 성공했다. 조심성없는 공병장교는 지뢰 매설작업에 대해 군 사령부에 보고하고 있었다.
지뢰 매설이라니? 러시아군은 포위망 남쪽 끝에 방어망 구축을 위해 지뢰를 매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등 뒤로는 루마니아까지 열려있는데도 불구하고.
코네프 편을 들자면 어떤 독일군 사단도 드니에페르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힘들었다. 수비군은 뒤로 돌아 제47 전차군단과 전선을 재구축했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히틀러는 이런 논리적인 움직임보다는 무조건 지역방어를 고수했다. 포위망에 갇힌 리브와 스템머만은 전투력이 크게 약화된 6개 사단을 가지고 340km의 돌출부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등 뒤에도 새로운 전선을 만들라는, 포위당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내렸던 명령을 또 다시 내린 것이다. 이제는 불가능한 키에프 공격을 위해 카네프 돌출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히틀러의 고수명령을 따르려면 기존의 340km 전선도 방어할 수 없는 병력으로 100km의 후방 전선까지 확장해야 한다. 이 명령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황당하게도 러시아군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덕분에 성공하게 된다.
2월 1일, 드니에페르와 부그 강 사이의 얼어붙은 땅 위로 눈보라가 몰아쳤다. 우크라이나의 겨울이 한창일 때에는 영하 15도와 30cm의 눈은 보통이다. 제1 전차사단의 정찰대대는 보급품을 실은 썰매를 끌며 아무 일도 없기만을 바랬다. 악천후때문에 아군의 공수도 불가능했지만 러시아군의 공습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대전후반까지도 말은 독일군의 귀중한 무기였습니다. 말을 탄 연락병이 나스호른 승무원에게 명령서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휴가증이었으면 좋겠지만, 코르순 포위망에서 휴가가 발급될 리도 없고, 고향으로 휴가를 간다고 해도 이 당시에는 연합군의 엄청난 폭격에 시달리고 있을 때라 전장터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2월 1~2일 밤에 예상을 깨고 날씨가 맑아졌다. 그리고는 더운 공기가 우크라이나의 검은 흙 위에 내렸고 유명한 진흙장군의 시간이 왔다. 이 기간 동안에는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어서 농부조차도 집으로 돌아가 난로의 불이나 지피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스템머만의 부대는 난로 옆에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진흙 속에서 행진하며 위치를 변경했고 침투하는 러시아군을 몰아내야 했다. 무릎까지 묻히는 진흙 속에서 병사들의 부츠는 박혀버렸고 장갑차의 궤도는 벗겨졌고 말은 쓰러졌고 자동차의 바퀴는 헛돌았다. 제5 SS 뷔킹(Wiking) 기갑척탄병사단의 전차와 돌격포만이 시간 당 3~4km의 속도로 진흙을 헤치고 나갈 수 있었다. 엄청난 연료를 소비했지만 밤이 되면 얼어붙는 진흙 속에 전차들이 갇혀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스템머만은 작전을 중지시키지 않았다. 그는 서쪽과 남동쪽으로 침투하는 러시아군에게 반격을 했고 전선을 꾸준히 축소시키면서 여유병력을 만들어 위기에 몰린 아군을 구해냈다. 드니에페르 강에서 부대를 물렸고 다른 부대들도 조금씩 후퇴시켜, 큰 병력은 아니어도 1개 대대, 1개 전투단이라도 예비군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킬레스 건은 존재했다. 전선이 끊기지 않게 유지하고 포위망의 핵이 될 코르순(Korsun) 마을과 비행장은 포기할 수 없었다. 러시아군은 코르순 포위망이라고 불렀고 독일 최고사령부는 체르카시(Cherkassy) 포위망이라고 불렀는데 러시아군의 표현이 좀 더 정확했다.
이렇게 해서 독일군뿐만 아니라 SS 의용연대의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군의 56,000명이 6개 군 병력의 러시아군 공격에 맞서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비극은 동부전선 내내 반복된 "너무 적은 병력으로,너무 늦게" 행동한 결과다. 1942년 11월, 구원작전 준비에 너무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고 너무 적은 병력을 투입했었다. 야전지휘관은 당연히 스탈린그라드의 교훈을 잘 알고 있었으며 히틀러도 그 교훈을 외면할 수 없었다. 체르카시에서 벌어지는 위기를 지켜보던 히틀러는 만슈타인 원수에게 2개 기갑군을 투입해서 독일군 전선으로 들어오는 적을 섬멸하고 코르순 수비군과 연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는 제3과 47 전차군단을 중심으로 9개 전차사단을 동원하려고 했다. 이 구원군에는 제1 전차사단, 제16 전차사단과 제1 SS 라이스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 전차사단과 같이 최고의 장비를 갖춘 사단도 포함되어 있어서 1개 사단이 러시아 1개 전차군단을 상대할 만했다.
구원계획은 과감하면서도 정교했다. 만슈타인은 포위망을 깨뜨리는 동시에 거꾸로 러시아군을 협공해 섬멸할 생각이었다. 즈베니고로드카(Zvenigorodka) 북쪽의 러시아군을 공격해 카네프를 방어하고 포위당한 아군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제1 전차군과 제8군 사이의 벌어진 틈을 다시 복구하는 작전이었다.포위당한 수비군은 5~10일만 버티면 대규모 반격작전이 시작된다는 희망으로 사기가 올랐다.
그렇다고 히틀러의 사령부에서 위급신호를 군과 군단에 보낸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드니에페르와 부그 강 사이에서는 히틀러보다도 훨씬 강력한 장군이 맹활약 중이었고 그 장군의 명령은 우크라이나 전장터의 숨은 땅 한 뼘까지도 지배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진흙에 빠지고, 대포가 진흙 속으로 가라앉고 장갑차가 꼼짝도 못할 때에는 최고의 계획도 소용이 없고 불굴의 의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움직이지 못하는데 뭘 어쩔 수 있겠는가? 그래도 각 부대는 먼 거리를 어떻게든 이동해야만 했다.
보만 장군은 히틀러가 보내는 '강철부대'만을 매일 기다렸다. 그는 정찰기를 타고 구원군이 오기로 되어 있는 길을 훑어 내려갔다 다시 오곤 했다. 마침내 지상 저 멀리에 첫 번째 연대가 보였지만 전차, 장갑차, 척탄병이 진흙에 갇혀 꼼짝도 못하다가 영하로 떨어지는 밤이 되어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코르순에 갇힌 아군을 위해 쉬지도 않고 300km를 이동한 제24 전차사단의 에델스하임(Edelsheim)장군은 다음 날 아침이면 작전을 펼 수 있다는 보고를 했다. 선봉대는 조금도 쉬지 않고 벌써 러시아군이 5일 전에 점령한 즈베니고로드카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상대할 적은 로트미스트로프의 전차군단이었다.
보만의 계획은 간단명료했다. 에델스하임의 전차사단이 2월 4일 오전에 러시아군을 관통하고 군단의 4개 사단으로 나뉘어진 적을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그 동안 독일군이 일부러 줄인 전선을 따라 러시아군의 전선은 길게 늘어졌기 때문에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작전이었지만 성사는 재천이라고 일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만다.
코르순에 갇힌 부대를 구원하기 위한 작전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에 니코폴(Nikopol)에서의 상황이 최악으로 변해버렸다. 러시아군이 쇠르너(Schorner)의 배후를 침투했고 군 전투단 전체를 위협하는 지경이 되었다.
(우에스기 왈: 18번째 이야기 니코폴 전투를 참조하세요.)
제24 전차사단이 차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동전에 투입할 병력이 없었고 긴급한 구원군 요청을 받은 히틀러는 니코폴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어서 2월 3일에 제24 전차사단을 아포스톨로보(Apostolovo)로 다시 돌려보낸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미 작전에 돌입할 준비가 끝난 사단을 다시 돌려보내봤자 진흙 속에서 며칠을 버려야 한다고 반대를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작 6군에게 필요한 것은 전차사단이 아니라 보병사단이라는 주장도 히틀러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뒤로 돌아 전진 이라니! 기차에 올려진 24전차사단은 그 고생을 하고 온 길을 되돌아갔지만 너무 늦게 도착해 스최르너의 돌출부를 방어하는 데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좁은 탈출로를 확보하는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24사단이 코르순에 그대로 투입되었다면 러시아군은 거기에 신경을 빼앗겼을 것이고 제47 전차군단은 포위망을 풀 수 있었을 것이다. 포위망에서 풀려난 2개 군단병력까지 합쳐서 대규모 반격작전을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고집이 이번에도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최고의 장비를 갖춘 정예 전차사단이 진흙밭에서 왕복하느라 양쪽 모두에서 귀중하게 사용되지 못했다.
워낙 상황이 어렵다 보니, 독일군이 러시아군의 전매특허인 멍청한 결정을 흉내내기 시작한다. 제24 전차사단이 다시 원상 복귀되어 제3과 47 전차군단의 합동작전이 어그러진 이상, 제3 전차군단을 주력 삼아 최대한 빨리 포위망으로 직접 전개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히틀러 사령부는 이전의 계획에 따라 제3 전차군단이 북쪽으로 먼저 이동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드빈(Medvin)의 고지대에서 동쪽으로 선회해서 포위망과 제47 전차군단 사이에 있는 러시아군을 배후에서 섬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2너무나도 낙관적인 작전이었다. 1개 전차군단이 적의 5개 군을 하나씩 분쇄해야 하고, 진흙장군이 더 이상 심술을 부리지 않아야 하며, 러시아군이 1941년도처럼 멍청하게 제자리에서 당해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브라이트(Breith) 장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2월 4일 오전에 공격을 시작했다.제16과 17 전차사단과 중전차연대만이 투입될 수 있었다. 중전차 연대의 강력한 괴수들, 34대의 타이거와 47대의 팬더가 선두에 서고 제34와 198 보병사단 그리고 SS 라이브스탄다르테 전차사단의 일부 병력이 측면을 엄호했다. 명령대로 북쪽을 향해 시작된 공격은 진흙과 적의 방어에 막혀 10km 전진한 것이 고작이었다. 진흙장군과 적의 4개 전차군이 연합으로 브라이트의 병력을 막아 세웠다.
브라이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라이브스탄다르테 사단의 본대와 제1 전차사단의 선봉대가 막 합류하면서 약간의 여유공간을 만들어냈고 제16 전차사단은 다시 한 번 공격할 기회를 잡았다. 2월 8일까지 중전차연대의 타이거와 팬더가 다른 부대의 지원에 힘을 얻어 그닐로이 티키치(Gniloy Tikich)까지 전진했다.
중전차연대는 엄청난 활약을 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포위망에서 34km 떨어진 지점에서 완전히 발이 묶였다. 히틀러는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포위망으로 바로 진격해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 2월 11일, 동쪽 측면을 엄호하기로 되어 있던 제1 전차사단이 서부 구원그룹(Relief Group West)의 선봉대에 섰다. 이들은 정면돌파를 시도해 그닐로이 티키치의 부즈한카(Buzhanka) 마을을 장악하고 교량을 고스란히 손에 넣었다. 교두보를 확보한 뒤 최단거리로 포위망을 돌파할 계획이었지만 러시아군이 알아채고 말았다. 적의 반격에 고전하던 제1 전차사단은 고지대에 가려져 알지 못했던 리샨카(Lysyanka)라는 마을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마을은 코르순 포위망 안에 보급품을 공수하던 Ju-52와He-111 폭격기의 항로에 있었는데, 제1 전차사단의 팬더와 척탄병이 2월 11~12일 밤 동안 리샨카의 남쪽을 기습했고 나머지 제1 전차연대가 지뢰밭과 대전차 방호물을 뚫고 마을에 진입했다.
(우에스기 왈: 사이드만-Seidemann 장군의 제8 비행군단은 1,536대의 비행기를 동원해 우만에서 코르순까지 2,027톤의 군수품을 수송하고 2,825명의 부상병을 실어 날랐습니다. 비행거리는 겨우100km 정도 밖에 안되지만 기상이 악천후였고 러시아군의 대공포화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폭격기의 피해는 상당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2부는 다음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