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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이 두려워한 위징
세계사 |
ues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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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6-25 22:45:33 조회: 1,803  /  추천: 3  /  반대: 0  /  댓글: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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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통하네뜨와 십상시를 보면서 정치와 사회가 안타까워서 당태종의 인재활용 그리고 위징이라는 양신良臣에 대해, 제 블로그에 정리한 내용을 여기로 가져왔습니다. 


충신忠臣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양신이라는 말은 어색할 겁니다. 오늘의 주인공 위징魏徵은 우리의 상식과 달리, 충신은 주군을 해치며 양신이 주군을 완성시키기 때문에 양신이 될 수 있는 외부인재를 중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충신은 일편단심으로 한 주군만을 위해 최선을 다해 거꾸로 주군이 현실에 안주하게 만드는 반면에, 양신은 주군보다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직언을 퍼부어서 결국 성군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충성집단이 있는 사람은 최고경영자나 권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정점에 오른 순간부터 경영자나 권력자는 결실을 맛보고 안주하게 되는데 충성집단은 이너서클InnerCircle,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서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며 보스를 권력의 매트릭스 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최고경영자나 권력자가 유연한 인성과 역량을 가지고 있다면 정점에 오른 후에도 인연이 닿지 않아 함께 하지 못했던 외부의 인재에게 문을 개방하고 그들이 전해주는 입맛 쓴 피드백을 수용하고 고민합니다. 

충성집단의 이너서클이 성벽을 두른 조직은 점차 관료주의로 정체되는 반면에, 외부인재가 유입되고 그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조직은 권한위임과 방임형으로 새로운 모습을 가져갑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인 당 태종 그리고 그를 완성시킨 양신, 위징魏徵의 일화를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당 태종부터 알아봐야겠죠? 그는 한족이 아닌 몽골 외곽의 선비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림은 건국신화에 흔히 등장하는 탄생일화죠? 어떤 면에서는 조선개국의 태조, 태종과 비슷한 흐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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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양제가 폭정으로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 아버지 이연을 따라 반란군에 참전했습니다. 장안으로 진격한 후에 아버지가 당의 황제에 즉위했고 자신은 진왕에 올랐습니다. 

그는 대단한 장수로도 이름이 높아서 당에 항명한 지방호족과 귀족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당의 초석을 다졌고 아버지에게서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별칭까지 받았습니다. 

낙양을 함락시키는 이세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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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은 대단한 야심가였고 지지세력이 많아지자 황태자 (형) 이건성과 제왕 (동생) 이원길은 이세민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이세민은 거꾸로 아버지를 이용해 그들을 궁궐로 불러 들였고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이라는 역변을 일으킵니다. 

궁궐 밖에 사병을 두고 홀로 들어설 수 밖에 없었던 이건성과 이원길을 포위해 공격했는데, 이원길이 먼저 활을 3번이나 쏘아 이세민을 공격했지만 모두 빗나갔고 이세민은 단 한 발에 이건성을 쏘아 쓰러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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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유일한 후계자인 이세민이 황태자가 되었고 2개월 후에 당나라 2대 황제 태종으로 즉위했습니다. 

 

그와 위징의 만남은 절대로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위징은 무공과는 거리가 먼 문신이어서 어지러운 세상에서 이리 저리 진영을 옮겨다녔고 심지어 이연(이세민의 아버지)의 진영에 두 번이나 가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요즘에도 회사를 한 번 나가면 재입사하기 쉽지 않은데, 당시에 경쟁사를 전전한 것은 물론이고 입사와 재입사를 계속 한 재미있는 인물입니다. 가는 곳마다 문을 닫았으니 운이 없기도 했죠.
 

당의 개국에 반란을 일으킨 두건덕의 진영에 있다가 이세민에게 진압되자 오갈데가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황태자 이건성이 문신으로서의 자질을 인정하고 그를 불러 도서를 관리하는 세마라는 직책을 맡겼습니다. 점차 이건성에게 조언을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세민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를 선제공격해서 독살해야 한다고 간언했습니다. 


역변을 일으킨 이세민 앞에 위징이 서게 되었습니다. 

"너는 무엇때문에 우리 형제 사이에 끼어들었나?"

"만일 태자께서 제 말을 들었다면 오늘같은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태자께 충성을 다한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관중도 제환공의 허리띠를 활로 쏘아 맞추지 않았습니까?"


충신이 아니라 양신을 찾던 이세민은 위징을 즉시 사면하고 간의대부로 승진시키며 자신의 반응과 상관없이 직언을 하게 했습니다. 태종으로 즉위한 후에도 급한 성격을 참지 못하고 사람을 쉽게 죽였던 그였기에 위징의 직언에 분노한 적도 많았지만 나중이라도 그의 뜻을 헤아리고 반성하는 세계역사에서 보기 드문 군신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태종이 노조상이라는 사람을 교주자사로 임명했지만 그가 거부를 하자 화가 치밀어 사형에 처했고, 위징은 태종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를 기다렸다가 선인의 사례를 들며 태종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태종은 후회하며 감정이 아닌 법률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태종의 오랜 충신인 복주자사 방상수가 부패행위를 저지르고 관직을 박탈당하게 되자 태종에게 용서를 구했고 태종은 충신의 옛정을 생각해서 경고만 하고 자사관직을 다시 주려고 했습니다. 위징은 태종에게 이렇게 간언했고 방상수는 관직을 박탈당했습니다.

"방상수는 죄인인데도 그에게 상을 내리고 관직에 복귀시키셨습니다. 다시 법률보다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운 것입니다. 충신이 그렇게 많은데 그들이 저지르는 죄를 모두 용서하실 것입니까? 상을 내릴 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하며, 처벌할 때에는 측근에게 가차없어야 모든 사람이 납득할 것입니다."


태종이 국방을 강화하겠다며 16세 이상의 남자로 병역을 강화하자 위징은 다시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위징(그림)은 태종의 결정이 법률과 어긋난다며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고 태종은 몹시 화를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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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을 말려 물고기를 잡고 수풀을 태워 사냥하는 것은 닭을 잡아 계란을 꺼내는 것입니다. 병력은 숫자보다 질인데 나이도 안 찬 사람을 징병하시겠다는 것입니까?" 


태종은 자신의 결정이 경솔했다고 인정하고 다른 신하에게도 잘못된 결정에는 동의하지 말고 직언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간관과 사관도 정사를 논하는 회의에 참석시켜 조언과 기록을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위징의 인사원칙에 따라 궁궐 밖의 인재 심지어 자신에게 반대했던 인사를 중용하기도 했습니다.


황제인 동시에 무장이었던 태종이 위징을 어려워한 일화가 있습니다. 태종이 사냥을 나가려고 수레와 말을 준비했다가 취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위징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는군요.


"원래는 사냥을 나가고 싶었는데 그대에게 야단맞을 일이 두려워 포기했소."


태종이 매 한 마리를 헌상받고 몹시 기뻐한 일이 있었습니다. 팔 위에 올려두고 즐겼는데 위징이 다가오자 잔소리를 들을까봐 매를 서둘러서 품속에 넣었습니다. 태종이 매 한 마리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못 마땅했던 위징은 일부러 태종 주변에서 시간을 끌었고 결국 매는 태종의 품속에서 질식해 죽었습니다. 태종은 심지어 위징을 죽이겠다는 생각까지 했었지만 결국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위징은 태종에게 겁없는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비위를 맞추는 희소식보다는 두루 폭넓게 들어 밝아지고 편벽되게 들어 어두워지지 말라는 조언도 했습니다. 심지어 황제에게


"윗사람들의 행실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행되지만,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이해되지 않습니다"라며 인격수양까지 거론했습니다. 그리고 태종의 궁전수축이나 봉선대례(도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황제가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리는 행사. 이 제사를 지내야 진정한 황제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했음) 모두를 반대했고 결국 취소시켰습니다. 


"폐하의 공로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백성들은 아직 폐하의 은덕을 느끼지 못하고 폐하의 덕행이 아무리 순후하다 해도 덕정이 아직 전국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징조가 많지만 법은 여전히 엄격하고, 몇 년 동안의 풍작에도 양곡창고는 아직 비어있습니다. 봉선대례를 할 시기가 아닙니다"라며 태종이 의식보다는 실질적인 내정에 주력하라는 충고도 했습니다. 


위징이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궁궐의 높은 관리는 모두 조문시키고 직접 비문을 써서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사후에 그가 태종을 능멸했다는 오해가 빚어졌고 성격이 급했던 태종은 비석을 깨부숴 보복을 했습니다.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서 참패를 당한 후에 귀국하면서 "위징이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나한테 이런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魏征若在,不使我有是行也)"이라고 반성하며 비석을 다시 세워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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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그릇이 워낙 컸기 때문에 위징과 같은 가시돋힌 인재를 품을 수 있었고 결국 중국최고의 황제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위징을 떠나 보낸 태종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서 의관을 바로잡고, 옛 것을 거울로 삼아서 역대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아서 자신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위징이 죽음으로서 짐은 거울 하나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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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들리는 뉴스가 용비어천가뿐이어서 답답한 마음에 옛 이야기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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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길지만 읽어보니 흥미롭네요^^
이런 글 좀 더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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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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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미지들이 안 보여서...ㅜㅜ...약간 줄어들지만 그래도 유익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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