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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관매직, 술주정이의 레드코트(영국군)
세계사 |
ues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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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6-25 17:08:59 조회: 2,193  /  추천: 0  /  반대: 0  /  댓글: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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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야기는 근대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미국까지 영국 제국주의의 선봉에 섰던 레드코트(Redcoat)이야기입니다. 영국 정규군을 말하지만 영국군이라고 하면 그들만의 특색이 사라지기 때문에 레드코트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재미를 위해 약간의 과장이 있습니다.

제 블로그에서 가져온 것이라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매관매직, 술주정이의 레드코트(영국군)

 

19세기 프랑스 저자 Ernest Renan, 나라들이 역사를 기억할 때에는 어느 정도의 왜곡이 있고 전사에 있어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고 주장했다. 미국독립전쟁은 숭고한 자유시민 지원병들이 '영광스러운 목표'에 목숨을 바쳤다는 신화를 만들어냈지만, 전쟁에서 패한 영국에게는 독일 용병, 왕당파와 레드코트의 실수투성이 합작품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선량한 병사라도 나쁜 전투에 참전할 수 있으며, 사기가 항상 넘치는 것도 아니고 오늘의 영웅이 내일은 겁쟁이가 될 수 있다. 레드코트를 입었든 블루코트(미군)를 입었든 상관없이 잘 조직된 군대도 맹종, 가학, 패배주의의 복잡한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명령이 정확하게 일반 사병에게까지 제대로 전달되는 군대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레드코트를 '미국독립전쟁 당시 대부분의 전투를 이긴 대단한 군대'라고 칭찬한 사람이 있다. 레드코트가 벙커 힐, 부룩클린, 브랜디와인, 저먼타운, 사바나, 캠던, 길포드 코트하우스와 같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결국 전쟁에서 졌고 미국 식민지를 잃었다.

 

(사실 레드코트가 세계 최강의 군대는 아니고 유럽에서도 절대강자의 지위는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의 중심은 해군으로, 육군은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에 비해 열세였습니다. 그래도 해군에 대한 투자를 그렇게 많이 하고도 강력한 육군을 유지하며 전세계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다는 점은 대단했습니다.)

 

레드코트는 어떻게 전세계 전장에 나타나고 그렇게 효과적으로 싸웠던 것일까?

 


 

미국독립전쟁 당시의 레드코트는 대부분 지원병이었다. 마을에 몇 명의 드러머와 함께 연대단위 모집관이 연설을 하면 계약을 하는 형태였다. 사기성 모집도 적지 않았다. 술에 취해 여인숙에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서 보니 자원입대한 것으로 되어 있고 주머니에는 누군가가 넣어준 돈이 들어 있었다.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면하기 위해 자원입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너무 긴급한 상황일 때에는 '신체가 건강한 남성이 적법한 상업활동이나 근로활동을 입증하지 않으면...' 강제징집하기도 했다.

 

1778년 버크셔의 한 관리는 장관에게 '강도와 도둑질로 구속된 범죄자들이 있는데 육군이나 해군에 상당히 쓸만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William Redmore Bigg이 그린 Trepanning a Recruit -신병 꼬시기-. 영국 모집관이 호구를 잡아서 입대지원서에 서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군 복무는, 특별힌 어떤 전쟁을 위해 계약한 것이 아니라면, 평생 계속되지만 실제로는 그 병사가 부상을 입었거나 나이먹었을 경우 또는 해당 부대의 병력숫자가 너무 적어졌을 경우에는 군복무에서 풀어줬다. 의사검진을 받은 후에 입대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의료수준이나 채워야 할 숫자때문에 형식적인 절차였다. 군입대 나이는 17~50세였고 드러머는 소년병을 모집했다.

 

영국군은 프랑스나 프로이센과 같은 유럽 강대국과 비교해서 적은 수로 참전하고 평화를 유지했다.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은 118개 보병대대(당시 연대와 대대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았다) 30개 기병연대로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

대위가 지휘하는 중대는 1768년 당시에는 3명의 장교, 3명의 하사, 3명의 상사와 2 명의 드러머와 47명의 사병이 있었으며 경보병과 척탄병 중대는 서류상으로는 더 많은 병사가 있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1779년 제42 로얄 하이랜더는 80명 중에 무려 50명이 아픈 상태여서 30명 만이 전투에 나설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연대장이 연대 자체를 소유했다고 해도 보면 된다. 보통 귀족이나 재력가 출신인 연대장이 자신의 돈으로 모병을 했고 정부는 무장을 위한 돈만 지원했다. 제대로 무장을 시킬 수도 있었고 자금 중 상당부분을 유용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대대 중 하나를 직접 지휘한다면 장교 한 명의 급여도 챙길 수 있었다. 직속 대대의 실제 지휘는 중위에게 맡겼는데 연대 내의 장교 인사권은 쥐고 있었기 때문에 매관매직이 일반적이었다.

 

(1750년대까지는 지휘관 이름을 붙여, 우에스기 연대... 이렇게 부르다가 나중에는 창설순서대로 번호를 붙였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뒷번호 연대부터 해체를 하기 때문에 군경력이 반드시 필요했던 사람은 앞번호 연대에 임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가장 빠른 방법은 배경과 돈이었습니다. 장교임관과 진급은 보통 돈으로 살 수 있었고 중령까지는 그렇게 진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연대장이 돈을 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병에 큰 돈이 들어갔고 병사의 급여, 충원 등의 부담이 컸기 때문에 연대장은 상당한 배경을 가지고 있어야 연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리들리 스콧의 명작 배리 린든을 보면 귀족자리를 따내기 위해서 주인공이 연대를 사서 식민지로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장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임관할 수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있었지만 전시에는 많은 부대가 급하게 구성되면서 필요한 장교 숫자가 급증했고 견습장교(Gentleman Volunteer, 사병신분으로 합류해서 일정기간 후에 장교로 임관하는)로 군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사병들도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다. 1770년에 입대한 제이콥 브런트는 1811년에 중령까지 진급했었다.

 

장교가 은퇴하거나 전사한 경우, 선임 순으로 진급했지만 조작이 가능했다. 재력이 있는 장교는 원하는 연대를 골라 더 빨리 진급할 수 있었다. 웰링턴 공은 아더 웨슬리라는 이름으로 1787 3, 73 보병연대에 임관했었다. 1791년에는 제58 경용기병대에서 대위로 진급했고 1793년에는 제33 보병연대의 소령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해 10월에는 겨우 24살의 나이로 중령 계급을 달았다. 33연대를 지휘하는 동안 대령으로 진급했고 1802년에는 준장이 되었다.

 

어느 군대나 마찬가지로 영국군도 채찍과 당근을 사용해 부대의 단결력을 유지했다. 규율은 엄격해서 사소한 위반은 채찍질을 당했고 심각한 범죄는 처형을 당했는데 비도적적인 일에 대해서는 벌금형을 내렸다. 탈영하는 경우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사면되는 일이 많았다. 1779 7, 존 서덜랜드 일병은 탈영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사면되는 순간에 기쁨으로 거의 실신지경'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교가 사병에게 손을 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피블 대위가 술취한 병사를 때린 후에 후뢰하는 글을 남겼는데, 영국 장교가 독일병사를 때린 것에 많은 병사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사기를 높이는데에는 정확한 급여지급, 승진, 좋은 음식과 약간의 술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술은 병사들이 전투의 두려움을 잊게 하려는 것보다 원정지에서의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목적이었다.

적의 재산을 노획해 나누어주는 상금도 사기 진작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계급 순서로 나누어가졌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된 경우가 많았다.

 

레드코트의 전투력에는 '자신감과 외국인혐오증'도 한 몫을 했다. 독일용병 헤센 대위는 레드코트의 전투력에 대해 '무한한 자긍심과 오만함' 덕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1781년 요크타운에서의 항복을 지켜본 프랑스인은 영국군이 거의 헐벗은 농부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정복자같은 오만함을 보여 놀랐다고 한다.

 


 

(미국독립전쟁에서 영국과 국왕에게 충성하는 사람도 꽤 많았습니다. 그래서 현지에서도 영국군을 모병했었죠.)

 

미국독립전쟁은 다른 전투와 달랐다. 영국군은 시가전이나 산악전 연습을 자주 했고 경보병대가 험지에서 시민군을 상대할 수 밖에 없었다. 일부 장교들은 보병이 밀집대형으로 일제사격을 퍼붓는 프로이센 전투방식을 선호했지만 미국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1780년 캠던과 같이 밀집대형 전투가 있기도 했지만 아주 드문 경우였다.

 

레드코드가 공격을 할 때에는 약 30m 거리에서 일제사격을 한 후에 소리를 지르며 총검을 앞세워 돌격하고 시민군은 도망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격-함성-돌격 순서는 독립전쟁 내내 계속되었고 웰링턴의 1812년 살라망카 전투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살라망카에서는 프랑스 패잔병이 기병대에게 학살당했던 반면에 미국에서는 시민 패잔병이 숲으로 도망가 목숨을 건졌고 다시 저항에 나설 수 있었다.

 


 

영화 'Patriot'에서 당시 유럽출신 장교들의 독특한 자만심에 대해 잘 보여주었죠. 이 장면은 Camden 전투 장면입니다. 좋은 화질이니까 소리 높여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ps. 영화에서 나오는 밀집대형에 대해 이해못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당시 가장 강력한 전술이었습니다. 군사천재로 손꼽는 나폴레옹을 비롯해 유럽전체가 사용했으니까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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