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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반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몽고메리는 다시 공세를 퍼붓는다. 7월 4일, 제3 캐나다군 사단이 카르피에를 공격한다. 독일군의 포에 심각한 손실을 입었지만 밤이 되자 마을의 북쪽에 진입하는데 성공했고 예비병력이 없었던 독일군은 반격에는 나서지 못한채 가까스로 더 이상의 전진만 허용하지 않는다.
캉 수복을 연합군 지휘관 사이의 자존심문제로 생각한 몽고메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로 한다. 영국군 1군단을 상대로 캉을 지키고 있던 히틀러유겐트 사단에게 4일 동안 2,600톤의 폭탄을 퍼부어 캉의 수비선을 산산조각낸 것이다.
보충병은 고사하고 탄약도 보급을 못받던 사단병력의 사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럼에도 후퇴하지 않고 처절한 방어를 하기로 결심했던 마이어도 7월 8일 결국 전멸의 위기에 몰린 소년병들에게 방어진지를 버리고 탈출할 것을 명령한다. 7월 9일 영국군은 캉을 수복하고 12사단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12사단이 반격에 나섰을 때의 150대 전차 중 겨우 65대만 남았고 병력은 60%이상이 사라졌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며칠 밖에 안된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년병들이 베테랑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현장에서 생사를 오갔지만, 모국의 SS 신문은 “수천대의 전투기, 우르릉거리는 포화, 무지막지한 전차공격이 그들에게 쏟아졌다. 지축이 흔들렸고 지옥이 열렸다. 그렇지만 용기에게는 신념이라는 친구가 있다. 피로 얼룩지고 흙먼지로 더럽혀졌고 전투로 숨차 올랐지만 참호에서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젊은이들이 영국-미국인이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라고 왜곡해서 찬양했다(글 마지막의 동영상 참조).
일본만화의 한 장면. 실제 사진이나 동영상보다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어서 인용했습니다.
영국군이 6월 30일에 이유도 없이 철수한 112고지를 되찾은 독일군은 캉 뒤쪽의 오돈계곡Odon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독일군 기갑부대가 다시 미군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하자, 영국군은 112고지와 부근 마을을 다시 점령하기로 결정한다.
7월 10일 주피터Jupiter 작전이 개시된다. 12 SS 사단의 일부 병력이 여전히 오른 강과 에레트빌Eterville 사이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은 연합군에게 방어선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한 젊은 병사는 자신의 일기에 영국군과의 조우를 “0630시에서 0800시까지 다시 한 번 기관총 세례가 있더니 토미Tommy(영국군)가 몰려왔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막았지만 이길 수 없는 전투를 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 살아남은 전우들이 뒤로 물러나자고 했을 때에는 이미 포위된 상태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 날, 12사단은 전선에서 물러나 팔레스Falaise 북쪽 30km 지점에 있는 포타이니Potigny에서 재정비를 받게 된다.
이 휴식도 오래가지 못했다. 영국군의 다음 작전인 굳우드GoodWood가 캉 동쪽에서 7월 18일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공격이 시작되자 마자, 12사단은 적의 공세를 막도록 투입된다. 영국 제2군 정보부는 “제12 SS는 예비군 수준으로 전투준비가 안되어있으며 겉모습만 12사단의 모습일 뿐이다”라고 기록했다.
50대의 전차만 보유한 12사단은 크라우제Krause전투단과 발드뮐러Waldmuller전투단으로 나뉘어 캉 남부 전선의 핵심전력이 되었을 정도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도시 부근에 쉴새없이 몰아친 공격으로 독일군의 전력은 급속하게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합군이 하늘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을 받을 수도, 구원을 받을 수도 없었다.
굳우드 작전 바로 다음에 코브라Cobra 작전이 시작되어 미군이 서쪽을 돌파했고 독일군은 패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팔레스 포켓. 히틀러가 뒤늦게 반격을 가한다고 병력을 맹목적으로 밀어넣다가 포위되어 20만명의 독일군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코브라 작전 다음의 블루코트Bluecoat 작전개시와 함께, 영국 제2군이 공세에 나선다. 8월 8일,다시 토탈라이즈Totalize 작전에서 캐나다 제1군이 선봉에 선다. 연속적으로 펼쳐진 지역은 모두 12사단이 투입된 곳인데, 이 작전에서는 사전 제압포격없이 야간에 장갑차와 트럭에 탑승한 보병들이 방어선을 뚫고 들어간 후에 수비병을 공격하는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적용했다.
연합군의 공격은 계획대로 진행되었지만 독일군이 그나마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이어의 결연한 의지덕분이었다.
마이어는 나중에 폭격이 끝난 직후 정찰에 나서 “캉에서 팔레스까지, 제89 보병사단의 잔해가 끝없이 펼쳐졌다. 공포에 질린 패잔병들이 달아나고 있었는데,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무슨 일이던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도로 정가운데 서서 그들이 달아나면 나 혼자서 여기를 지켜야 한다고 고함쳤다. 길 한가운데에서 호소하는 사단장을 보자, 그들은 멈춰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제 위치로 돌아갔다”라고 회상한다.
패잔병들이 돌아간 자리로 전차와 대전차 포를 보내 지원하게 만든 후에, 두 개의 전투단에게 마을 북쪽에서 반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패주하는 부하들을 돌려세우는 전설적인 장면. 히틀러가 바라던 무장친위대 지휘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별 걸 다 가지고 있죠? ㅡ.ㅡ
일본의 유명한 전쟁극화가 小林源文씨의 만화 Panzergrenadier의 한 장면입니다.
일본에 가서도 이런 책이나 사러 돌아다니니 아내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
연합군의 계속되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대전차 포는 캐나다군의 전진을 막아냈다. 이후 2일 동안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필사적인 방어를 펼친데다가 간헐적으로 반격도 시도했었기때문에 12사단은 이제 전투단 수준으로 약화되어버렸다.
연합군은 폭격으로 진격로를 열려고 했지만 나포한 정찰차량에서 나온 정보덕분에 마이어는 병력을 제시간에 뒤로 물린다. 8월 14~16일에 걸쳐, 500명 정도의 기갑척탄병과 15대의 전차가 제3 캐나다군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팔레즈의 북동쪽에 있는 159 고지를 지켜낸다. 결국 제2 캐나다군 사단이 포격과 공중폭격의 지원을 받아 서쪽 방어선을 무너뜨리자 독일군은 고지를 내주고 만다.
팔레즈에는 12사단의 60명 정도의 소년병이 배치되었을 뿐인데도 무려 3일을 버텨냈지만, 팔레즈가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영국군과 미군의 큰 협공작전이 겨우 20km만 남겨두고 완성되었으며 그 안에 19개 사단이 갇혀 공중폭격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에게는 단 하나의 탈출로만이 남겨졌는데, 탈출로의 북쪽 전선은 만신창이가 된 12사단의 잔여 병력에게 맡겨졌다. 그들의 임무는 독일 제7군의 패잔병들이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버텨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한 히틀러의 단 한치의 땅도 포기하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19개 사단 중 절반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나마 2일 동안 연합군의 막대한 물량공세를 받아낸 12사단덕분에 절반이라도 탈출할 수 있었다. 철수가 완료되자, 마이어는 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 농부의 도움을 받아 디브Dives강을 건넌다. 8월 22일, B 집단군은 제12 SS 기갑사단이 10대의 전차, 300명의 보병 그리고 단 한 문의 야포도 없이 탈출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사실상 12사단은 노르망디에서 전멸한 것이다.
히틀러유겐트 포로 사진. 치열한 전투와 그들의 꺾일 줄 모르는 용기가 드러나는 사진이어서 유명합니다.
히틀러유겐트뿐만 아니라 1944년의 다른 독일 국방군이나 친위대도 모두 필사적인 방어와 반격을 펼쳤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12사단의 무장수준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훈련을 제대로 받을 시간이 없었고, 다른 독일군 사단병력과 같이 작전 중에 포수, 공병대, 취사병, 심지어 사령부 사무병까지 기갑척탄병으로 곳곳에서 전투를 벌일 정도로 압박을 받았다.
그렇지만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노동자당이라는 이름에 바친 소년병들의 한결 같은 희생정신은 12사단만이 가지고 있었던 특징이었다. 12사단으로 징집되거나 자원한 소년병들은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에밀 더Emil Durr하사가 캐나다군의 화염방사 전차를 향해 3번이나 돌격한 끝에 파괴하고 목숨을 잃어 철십자 훈장을 받은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임무를 다하려는 헌신, 작전 중의 용기, 그리고 굳건한 신념은 군인이라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지만, 잔인한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반격작전 중, 여러 건의 포로와 시민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소년병들은 6월 7일~16일의 기간 동안, 64명의 영국군과 캐나다군 포로를 죽여 악명을 얻었다. 마이어는 포로가 된 후에 뷔롱, 오티, 아른덴 수도원에서의 포로 학살에 대한 재판을 받게 된다.
노르망디 이후에도 히틀러유겐트는 계속 전투에 참가한다. 제12 SS 기갑사단은 재편성되어 6개월 후에 진행되는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인 아르덴느 전투에 투입되지만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다. 앞서 많은 선배들이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 소년단이라는 깃발아래 징집된 소년병들은 선배들이 가졌던 이상주의를 계속 이어간다.
죽은 소년병에게서 나온 편지는 사단의 다른 소년병들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다. “공격 몇 시간 앞서 이 편지를 쓴다. 모두들 다음 전투를 기대하고 있어. 일부는 삶을 최우선으로 여기겠지만 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야. 우리가 공격을 하고 적을 국토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이건 성스러운 임무야. 내 머리 위로 V1 로켓과 야포의 굉음이 울려퍼지고 있다. 바로 전쟁의 목소리가.” 편지봉투의 뒷면에는 “룻(여동생의 이름)! 룻! 룻! 우리가 전진한다!”라고 쓰여있었다
반전의 히틀러유겐트 포로 사진
초기에는 그래도 16~18살이었습니다만, 그나마 소진하고 나니 갓 10살을 넘긴 애들까지 동원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독일 드라마의 한 장면인데 히틀러 개**가 소년병들 세워놓고 베를린 방어를 부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죠.
지도자 하나 잘못 만나면 3대가 세상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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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군요. 저렇게 어린것들을 부추겨 전투에 내보내다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