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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정리했던 이야기를 네이버 블로그로 옮기고 있습니다. 용어와 명칭에 혼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전 이야기는 http://blog.naver.com/uesgi2003 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자포로즈예 (Zaporozhye)
드니에페르 강의 측면을 지키는 요새-6개 사단과 1개의 전차엽병연대-말리노브스키이 3개 군으로 공격하다-낙하산으로 투하된 편지-스탈린의 흑-백-적 외인부대-수력발전 댐의 위기-"헨리치, 목숨을 걸고 싶나!"-2백 톤의 다이너마이트-목표를 초과달성한 러시아군의 승리
키에프 지역만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크레멘추그(Kremenchug)와 체르카시(Cherkassy)에서도 상황은 암울했다. 코네프 장군은 이 지역에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투입하고 빨치산의 도움을 받아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0월 중순 이후에는, 자로포즈예가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변했다.공산당의 걸작인 거대한 댐과 '레닌' 발전소가 있는 자포로즈예는 스탈린그라드처럼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목표물이었다.
오늘의 이야기는 붉은 원 안의 자포로즈예로, 코사크족의 고향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곳을 잃으면 드니에페르 강 하류를 모두 잃게 되고 크리미아는 외딴 섬처럼 완전히 고립됩니다.우크라이나 산업지대의 전력을 절반 이상 공급하는 댐이 있기에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전략요충지였지만, 앞선 이야기에서와 같이 드니에페르 강의 모든 전선이 공격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충분한 병력을 배치시킬 수 없었습니다.
자포로즈예는 히틀러에게도 중요한 곳이었다. 그는 만슈타인에게 댐과 도시를 반드시 지켜내라고 요구했었지만 만슈타인은 드니에페르 강변 방어만으로도 병력이 모자랐다. 히틀러는 막무가내였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50만KW의 전기는 우크라이나 서부의 공업단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고 키로보그라드 금속가공 공장과 크리보이 로그의 광산을 움직였다. 자포로즈예를 잃게 되면 이 정도의 피해로 끝나는 것일까?
히틀러는 경제적 손실만 염려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포로즈예를 확실하게 방어한다면 러시아군은 드니에페르와 아조프 해 사이를 뚫고 들어와 크리미아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자포로즈예는 제6 군의 측면을 방어하고 북족에서 드네프로페트로브스크(Dnepropetrovsk)로 진격하는 러시아군을 요격할 수 있는 완벽한 위치였다.
만슈타인도 히틀러의 주장에는 동의했다. 그리고 러시아 전쟁기록에서도 독일군의 방어거점이 드니에페르 강 하류로 진격하려는 러시아군에게 위협이 된다고 확인해주고 있다. 자로포즈예는 드니에페르 측면을 방어하는 동시에 크리미아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아선 요새였다. 히틀러는 어떻게든 여기를 지켜내고 싶은 것도 당연했다.
1934년 당시의 자로포즈예 댐 건설사진입니다. 아래는 지금의 모습으로 그 규모를 한 눈에 보여줍니다.
"이로 물어뜯고 손톱으로 할퀴더라도 지켜야 하는" 최후의 방어전은 헨리치(Henrici)의 제40 전차군단에게 맡겨졌다. 40 전차군단에서 3개 전차사단, 제17군 군단의 보병사단을 차출해 군 규모의 헨리치 전투단이 만들어졌다. 당연히 드니에페르 동쪽 강변과 자포로즈예의 동쪽 돌출부를 모두 방어할 충분한 병력이 없었다. 6개 사단과 1개의 전차엽병 연대만으로 자포로즈예를 지키게 되는 셈이었다. 반대로 러시아군은 여기에 3개군, 1개의 전투비행단, 2개의 전차군단이라는 집단군 규모를 투입할 셈이었다. 10명의 러시아군이 1명의 독일군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엄청난 병력 차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대규모 공격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라인랜드-베스트팔리안 제16 기갑척탄병사단과 제656 전차엽병연대는 거꾸로 공세로 나서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포르쉐 타이거'라고도 부르는 페리디난드 초중전차는 막강한 88mm 포로 T-34를 하나씩 주저 앉혔고 216 전차대대의 15cm 자주포 47대는 기동력을 살려 적시적소에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었다.
불행히도 폰 준겐펠트(von Jungenfeldt) 연대는 구축전차 1개 대대와 두 대의 페르디난드만 보유하고 있었는데, 2~3배의 전력을 보유한 상태에서 몇 개 보병사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자포로즈예의 전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대전차 1개 연대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전투였다.
페르디난드 초중전차가 질주하는 귀한 사진입니다. 생산 수량이 91대에 불과해 파괴되거나 방치된 차량의 사진은 많았지만 질주하는 사진은 보기 힘듭니다.
전면장갑이 200mm이고, 88mm 장포신을 장착하고 있어서 스탈린 전차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정면대결로 패르디난드를 상대할 전차가 없었습니다.
재미있게도 페르디난드의 천적은 보병이었는데, 대전차전 전용으로 디자인된 초기에 보병을 상대할 최소한의 장비(기관총이나 S-마인 지뢰)를 갖추지 않아서 러시아 보병이 쉽게 접근해 파괴시키는 황당한 전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전차전에서는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해서 1943년 크루스크에서는 제653 중전차 대대가 13대의 페르디난드를 잃는 대신에 320대의 러시아군 전차를 파괴하는 대전과를 올렸었습니다. 보통 10배가 넘는 전차를 사냥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사진에서는 다른 전차의 큐폴라를 통해 불타고 있는 페르디난드가 보이고 있습니다.
페르디난드에 대한 사진은 http://tank.uw.ru/articles/samohod/ferdinand_a12/gallery/ 이나http://grayknight.narod.ru/Ferds_Kursk_43/Ferds_Kursk_43.ht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헨리치 장군의 마음은 무거웠다. 전선의 병력은 계속 줄어들어가는데 충원병력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탄약이 제 때에 보급되지 않아서 적이 빤히 보이는데도 포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재고가 심각했다.
10월 10일 오전, 말리노브스키이는 다시 한 번 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3개 군 모두를 동원한 총공세에 나섰다. 혹시나 일요일에는 독일군의 수비가 느슨해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바램으로 일요일을 선택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포격과 함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러시아군 최초로 포병사단을 독립시켜 작전에 투입했기 때문에 몇 개 지점에 신속하게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독일군은 나중에야 제18 포병사단을 운용한 결과에 따라 포병여단과 국민 포병군단을 창설했다.
자포로즈예의 독일군 수비선에 집중된 포격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했다. 독일군 수비선은 곳곳에 구멍이 났고 말리노브스키이는 전차를 투입시켰다.
남부의 노보-알렉산드로브카(Novo-Aleksandrovka)에서는, 호스트만(Horstmann) 소령의 구축전차가 구멍 난 수비선을 통해 들어오는 러시아군에 맞섰다. 저녁이 되자 러시아군은 물러났고 48대의 T-34가 파괴되어 연기를 뿜고 있었다.
페르디난드, 타이거, 팬저와 같은 중전차의 수량이 절대적으로 모자랐기 때문에 대전차전의 주력은 3호/4호 구축전차였습니다. T-34에 비해 장단점을 고루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전차병의 경험에 의존해 많은 전과를 올렸었지만 85mm의 T-34가 대량으로 투입되고 초중전차가 등장하기 시작한 후반기부터는 일방적으로 당하게 됩니다.
날이 밝자 어제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엄청난 포격에 이은 러시아군의 공격, 그리고 독일군의 반격. 헨리치의 보병은 2일째, 3일째에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적의 공세에 초인적으로 맞섰다. 러시아군은 후방에서 긁어 모은 예비병력을 투입해 막대한 출혈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돌격하다가 쓰러졌고, 우왕좌왕하며 후퇴했다가 다시 돌격해 들어갔다.
10월 12일 오전, 제123 보병사단 라우치(Rauch) 장군은 후방에 투하된 러시아군의 통신문을 입수해 헨리치 장군에게 보냈다. 봉인된 편지의 수신인에는 제123 보병사단 지휘관 에르빈 라우치 장군이라고 씌여있었다.
"친애하는 라우치 장군! 본인은 휴전요청 깃발을 들고 귀관을 만나려고 여러 번 시도했었지만 병사들의 사격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소. 이렇게 보내는 수 밖에 없어서..."
"우리가 사관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시절을 기억할 것이오..."
"귀관의 사단은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태이오. 포위되어 또 다른 스탈린그라드가 되고 있소. 부하들을 이끌고 우리에게 오기 바라오.... 최고사령부와 협의해서 사단과 귀관의 명예를 보장하겠소. 포로가 되어도 개인 소지품을 가질 수 있으며, 장교는 개인화기도 가질 수 있을 것이오. 사단은 해체되지 않을 것이며 노동에도 사단 그대로 투입될 것이오. 종전이 되면 가장 먼저 귀국할 수 있을 것이오." 서명: 본 세이들리츠(Seydlitz), 포병장군.
세이들리츠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가 된 후에 심리전의 일환으로 이런 편지를 쓴 것이었다. 댐의 북쪽에 전개된 제304 보병사단은 "자유독일국가위원회(Free German National Committe)"의 보다 과감한 심리전을 경험했다. 흑-백-적 삼색 깃발이 꽂힌 보트에 탄 독일포로가 국가를 부르며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사격을 퍼부어 내쫓았다.
스탈린의 흑-백-적 외인부대의 목소리는 무전기를 통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가 된 옛 상관이 부하들에게 희망이 없는 전투를 포기하고 국가위원회에 합류할 것을 권유했다.
한스 군터 후벤(Hooven) 대령은 제40 전차군단 사령부에 있을 때에 뛰어난 판단력으로 명성이 높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포로가 되어도 명예와 처우를 보장한다는" 목소리는 병사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잠시 옛 상관의 제의에 대해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못들은 것으로 하기로 했다. 지금의 전투는 히틀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위해 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배신할 수 없었다.
10월 13일, 공격개시 4일 만에 러시아군은 독일군 수비선을 큰 구멍을 내는데 성공했고 독일군 최대의 위기가 닥쳤다.
제40 전차군단의 전투일지를 보면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에 대해 잘 나와있다. 전차엽병 연대의 구축전차 대대에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며 러시아군의 전선침투를 알렸다. 8대의 T-34와 2개 보병연대가 독일군 수비선 5km 후방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뛰어난 성능의 구축전차의 활약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3대의 전차가 불타고 5대는 꼬리를 내리고 달아났다. 러시아 보병은 기관총 세례에 뿔뿔이 흩어지면서 전투가 끝났지만 전선의 구멍은 점차 많아지고 크기도 커져갔지만 전차엽병의 전력은 조금씩 줄어가고 있었다.
헨리치는 댐과 철도교량 접근로를 방어하는 작지만 효과적인 방어진지를 만들라고 명령해뒀었다. 다이너마이트 설치와 폭파작업을 위한 방어진지였었는데 댐을 폭파하려면 수위를 미리 낮춰서 하류에 있는 제6 군이 피해를 입지 않게 해야 했다. 그리고 다이너마이트 설치작업만으로도 24시간이 필요했는데 언제 폭파준비 작업을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최고사령부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언제 방어선을 뚫고 이곳까지 진격할 지 모르는 상태에서 최고사령부는 일선 지휘관에게 결정권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10월 13일 오전, 이제 댐이 러시아군 야포의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헨리치는 댐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최고사령부에 재량권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러시아군이 곳곳에서 전선을 뚫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긴급한 요청을 다시 보내고 참모를 전화기 옆에 붙여두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 시간 히틀러는 잠들어 있었고 사령부의 어느 누구도 그를 깨울 배짱이나 권한이 없었다. 결국 헨리치는 제1 전차군 사령관인 맥켄센(Mackensen)에게 전화를 했다. "상급대장각하. 발파관에 화약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수위도 낮추려고 합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멕켄센은 헨리치의 염려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귀관은 목숨을 걸고 있네"라고만 말했다.
10월 14일, 러시아군은 댐 방향으로 전차를 투입시켰지만 마지막 순간에 제16 기갑척탄병사단과 제421 척탄병연대의 병력이 가까스로 진격로를 막아섰다.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댐의 발파관에 연결된 도화선이 모조리 끊어졌다. 공병장교들이 전투 중에 바닥을 기어 다니며 일일이 도화선을 다시 연결시켰다.
발전소의 터빈실에는 2백 톤이 넘는 다이너마이트가 쌓여 있었다. 40톤은 댐의 발파관에 채워졌고 약 1백 개가 넘는 항공기 폭탄도 설치되었다.
헨리치는 오후 6시 45분에 철도교량을, 저녁 8시에 댐을 폭파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공병장교는 도저히 점화스위치를 누를 수가 없었다. 제16 기갑척탄병사단이 후퇴를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6 사단에게 두 시간 후에 폭파한다고 알려라."
"소령님. 제16 사단과 통신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젠장!"
제40 전차군단 작전장교 크리스티안 스토클(Stoeckle)중위에게 "16사단장을 찾아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찾아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중위는 불타는 자포로즈예를 향해 떠났다. 심지어 도로 옆의 모든 나무도 불붙어 있었다. 수 많은 병사들이 교량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지만 16사단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한 경험많은 병사가 어렴풋이 짐작한 농부의 헛간에서 슈베린(Schwerin) 장군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때까지도 촛불 아래에서 지도를 보고 있던 지휘관은 "16사단은 아군이 모두 후퇴할 때까지 전선을 유지한다"라는 명령을 내렸다. 폭파시간까지 교량을 건너지 못한 병력을 위해 보트가 준비되었고 아직도 전투에 휘말려 있는 전차엽병 연대를 위해 전차수송용 보트가 마련되었다.
10월 14~15일 저녁, 교량과 댐이 우뢰와 같은 폭음과 함께 폭파되었다. 엄청난 폭약이 사용되었지만1km 길이의 댐에는 몇 군데만 무너져내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폭포수가 떨어져 내렸고 하류는 모두 물에 잠겼다. 러시아군은 불타는 도시를 지나 댐의 동쪽 끝에 도착했고, 남쪽에서 전투를 마친 전차엽병 연대는 수송용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넜다.
이제 크리미아는 독일군 전선과 완전히 단절되어 고립된 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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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사에 관심이 많은데 좋은자료 감사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