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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일군은 우회전할 것’
기차역 직행이 안전하다는 헌병의 표지판이었다. 운전병에게 우회전하라고 말하고 천천히 역쪽으로 전진했다. 주변의 많은 사람도 표지판을 읽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포위망에서 빠져나왔다는 생각은 모두가 같았다.
100m 정도를 가자 말끔한 차림의 병사 한 병이 서 있었다. 패잔병 모습만 봤기 때문에 몽롱한 상태에서도 이렇게 깨끗하고 건강한 병사는 바로 눈에 띄었다. 야전헌병의 방향지시판으로 우측을 가리켰다. 너무 어두워서 부대표식을 알아볼 수 없었다.
지시를 따라 우회전하자 달빛 아래로 기차역의 철 인도교가 보였다. 길 옆에 깨끗한 차림의 아군병사가 더 나타나더니 기차역으로 유도했다.
요즘 밀리터리 피규어는 성인용 장난감 수준을 훨씬 뛰어 넘었죠. 고증이 대단합니다.
야전헌병의 모습입니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악명이 높았습니다.
운전병이 ‘야전헌병 보셨죠? 20군 쪽에서 왔을 겁니다. 조만간 만날 수 있겠죠. 그렇죠?’라고 물었다. 포수는 ‘20군이라면 너무 멀리까지 왔는데? 서쪽 30km 너머에 있어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깨끗한 군복의 야전헌병을 보면서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정지하라고 소리질렀고 판터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섰다. 대열은 계속 헌병의 지시를 따라 역으로 향했다. 뒤에 타고 있던 병사들도 뛰어내려서 대열 속으로 사라졌다.
야전헌병을 내려다봤는데 헬멧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부대표식이 없었다. ‘어디 소속이요?’라고 물었다. 헌병은 ‘야전헌병입니다. 중사님’이라며 경례했다.
아픈 등을 무릅쓰고 전차에서 내려 그 앞에 섰다. 수백 명의 병사와 민간인이 서로를 격려하며 지나고 있었다.
‘어느 소속이냐고!’
‘빨리 가시죠. 중사님. 적군이 옵니다.’
‘어디 소속이야!’
그 순간에 민간인 무리가 우리 사이를 갈라 놓았고 헌병이 사라졌다. 나무 밑으로 몸을 낮추고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자이들리츠Seydlitz다. 저놈들 자이들리츠다’라고 소리질렀다.
자이들리츠Seydlitztruppen부대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투항한 발터 폰 자이들리츠 쿠루츠바흐Walther von Seydlitz-Kurzbach 장군이 독일군 포로를 모아 소련에 협력한 반나치 병사조직이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한 6군은 파울루스 원수에 이어 자이들리츠까지 최고 지휘관이 악명을 남겼습니다.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독일군복을 입고 엉터리 표지판을 붙이고 교통을 교란시켰다.
여전히 수백 명이 우리 전차를 지나 역으로 향했다. ‘자이들리츠 군이라니깐!’라고 소리쳤는데 내 주변에 있던 일부만 멈췄을 뿐이고 나머지는 그대로 흘러 들어갔다.
몇 초 안되어서 역안에서 총성이 터졌다. 어둠 속에서 인도교 위로 총구 섬광이 끊이지 않았는데 양쪽 모두에서 번쩍거렸다. 역으로 몰리던 사람들이 비틀거리고 쓰러졌다. 뒤에 있던 사람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다가 쓰러진 사람을 밟거나 걸려 넘어졌다.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엄폐물을 찾아 우리 전차로 몰려들었다.
판터에 뛰어 올라 역으로 향했다. 입구는 사람과 수레로 막혀 있었고 수류탄까지 터졌다. 역에서 도망쳐 나온 병사의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그는 ‘사람들을 이끄세요. 중사님 전차를 따라갈 겁니다. 역에서 데리고 나가세요. 제발’이라고 소리쳤다.
‘그렇지만 역 안에 사람들이 있는데…’
‘이미 죽었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제발 다른 사람이라도 데리고 가세요.’
전차를 들판 건너로 천천히 이동했다. 정신이 나간 피난민과 병사들이 뒤를 따라왔다. 들판에 있을 지뢰나 포격이 염려되었다. 달빛과 멀리서 터지는 섬광만으로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가늠이 안되었다.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이 옆으로 기어 올라와 좁은 도로를 가리켰다. 할베 철도를 건너 숲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포탄이 떨어져도 마구잡이라 피해는 크지 않았다. 숲 굽은 구간에서 카포의 판터를 들이 받을 뻔했다. 이대로 가다가 유지보수 한계를 한참 넘은 기어와 트랙이 손상될 수 있어서 날이 밝으면 다시 움직이기로 했다.
새벽 2시, 판터 2대를 길옆 나무 밑에 숨겼고 뒤따르던 사람들도 나무 둥치 아래에 몸을 뉘었다. 보병 몇 명을 골라 경계를 세웠다. 카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베를 빠져 나왔군. 킹타이거가 전방 어디에 있을 거야. 다시 연결될 때까지는 우리끼리 버텨야지. 자이들리츠 놈들을 조심해야 해. 역에 시신이 가득이라고 하더군.’
‘군복을 보면 자이들리츠 놈들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달라서 말끔합니다.’
‘병사들도 패전을 알겠지. 몇 명이나 싸우려고 할까? 2~30%만 싸울거야. 나머지는 구경만 하겠지.’
‘그렇다면 2~30%만 가지고 싸워야죠.’
카포는 등불을 최대한 낮춰 켜고 지도를 폈다.
‘죽은 포병에게서 찾았네. 여기가 현위치야.’
당시 위성에서 볼 수 있었다면 절망적인 상황이 한 눈에 보였겠죠.
우리는 할베 남서쪽 숲지대에 있었다. 서쪽 엘베강까지 가면 20군이 확보한 길을 따라 미군에게 투항할 수 있었다. 20군에게 가려면 2개의 이정표를 더 통과해야 했다.
먼저 북-남으로 쭉 뻗은 아우토반Autobahn이 있었다. 적군은 그대로 베를린을 향해 북진했기 때문에 남쪽의 농촌지대는 비워 두었을 수 있었다.
카포는 ‘아우토반을 가로지른 후에 20km 더 가서 철로를 건너야 하네. 성공하면 20군 친구들을 볼 수 있을 거야. 그 후에는 반가워 미군이지’라고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를 가로 질렀다. 아우토반, 철로 그리고 엘베강.
희미하게 웃었지만 등뒤의 고통만 심해졌다.
과거에는 전차 안에서 잠을 잘 잤다. 얇은 철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팔이나 손가락을 머리를 받치고 포탑이나 포미에 기대면 금방 잠이 들었다. 밤새 전차 안에서 지내야 할 때에는 탄피가 화장실이었고 해치를 열어 냄새를 빼면 그만이었다. 이런 식으로 3명이 포탑에서, 다른 2명은 차체의 의자에서 지냈다.
할베 서쪽 숲에서의 밤은 좀처럼 잠이 찾아오지 않았다. 암페타민을 다시 삼켰다. 전차 주변도 잠들지 못했다. 대화, 울음,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상의 주머니의 아스피린을 뒤지다가 전차에 함께 탔던 여성이 준 사진을 보았다.
그녀는 죽기 전에 사진 뒤에 있는 주소의 아가씨를 찾아가 달라고 부탁했었다. 지금은 미군이 점령한 엘베강 서쪽 주소였다. 미인이었다. 다시 주머니에 잘 넣어두었다.
가까이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소리치고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땅을 내려다보는 병사들을 밀치고 무슨 일인지를 확인했다. 지금은 계급보다 전차병 군복이 더 효과가 있었다. 보병이 조금씩 물러났다.
땅바닥 나무 뿌리 근처에 자이틀리츠 놈이 주먹을 쥐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독일 국방색의 독수리 표식을 착용했지만 만자Swastika가 없었고 다른 병사가 주머니에서 찾아낸 완장을 내게 주었다.
자유독일국가위원회National Committee for a Free Germany 완장이었다.
자이들리츠 병사는 독수리 아래의 만자 문양을 떼어낸 모양입니다.
자유독일국가위원회의 완장입니다.
주변을 보니 민간인도 많았다. 그 중에는 무장한 여성과 청소년이 있었는데, 한 여성이 앞으로 나와서는 나뭇가지 위로 밧줄을 던졌다. 하늘에는 적군의 전폭기가 날아다녔고 그 아래에는 자이들리츠 첩자가 혀를 내밀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12살 정도의 소년이 그 놈의 발에 매달려 목을 부러뜨리자 입에서 끔찍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독일의 숲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서는 안돼’라고 말했다.
종군기자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아서 당시를 상상한 디오라마로 대신합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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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네요 ㅋㅋ 독일군 관점에서 보는 2차대전 신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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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