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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소설(이지만 논픽션)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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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j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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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01-03 02:29:05 [베스트글]
조회: 40,515  /  추천: 47  /  반대: 0  /  댓글: 24 ]

본문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좀 이른 시간이지만 마땅히 할 것도 없어 한적한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다.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먼저 타고 있는 윗집에 사는 듯 몇 번 마주친 아저씨가 머쓱해 하며 엘리베이터 구석 자리로 자리를 잡는다.

'안녕하세요~' 작은 소리로 인사하고 지하 주차장을 누른다.

엘리베이터가 채 2층을 지나기도 전에 조용히 꿀렁인다.

곁눈질로 거울을 바라보니 왼발과 오른발에 교대로 체중을 싣는 스텝을 밟고 있다가 거울로 눈이 마주쳤다.

흠칫 놀라며 급한 문자라도 온 듯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훑는다.

'체중 이동! 비거리 미쳤어요.' 어제저녁 JTBC 레슨 주제였다.

 

 

점심시간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과의 미팅을 위해 건널목에서 선다.

신호의 순서를 보아하니 이제 막 내가 건널 신호가 지난 듯하다.

건너편에 막 식사를 마친 것 같은 30대 후반의 남자 무리가 우르르 선다.

그중의 하나가 팔을 꼬아 빈 스윙을 보이자, 바로 옆 남자가 오른쪽 어깨를 내려준다.

그러고 나서 몇 번의 스윙을 하고 선 어깨를 내려준 남자에게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러자 뒤에 있던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등을 툭툭 치며 자신을 바라보라고 한 후

어깨너비로 다리를 벌리고서는 양손을 골반에 두고 천천히 돌리며 무어라 말한다.

그러자 얼른 어깨너비로 다리를 벌리고 자세를 취하는 사이에 초록 불이 들어온다.

좀 전에 어깨를 잡아 준 남성이 신호등을 가르키며 어서 건너가자고 재촉한다.

건널목을 지나며 그들의 대화가 스쳐 간다.

'~ 원래 지금은 슬라이스 나는 때라니까. 그게 정상이라고. 왼쪽 보고 냅다 지르면 된다니까~ 이따 스크린에서 다시 보여줄게'

아무것도 모르는 가여운 어린 양 한 마리가 늑대의 무리와 함께 지나갔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니 종일 시큰거리던 엘보우가 잠잠해진다.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도 쉽게 잊혀진다.

아휴... 빗방울 떨어지겠는데요... 비오기 전에 얼른 퇴근하시죠~’

야근을 하고자 했으나 비 소식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쉬워 하는 연기로 오디션을 본다면 우리 사무소 전원 합격일 것이다.

주인없는 우산을 하나 챙겨들고 천천히 사무실을 나선다.

까톡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 우유와 맥주를 사오라는 아내의 오더가 내려왔다.

‘0 0’

짧지만 확실한 확인을 남기로 근처 마트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트 주차장 구석에는 담배를 태우며 장을 보고 있는 배우자를 기다리는 듯한 남자가 서있다.

올라오는 매운 연기에 잔뜩 얼굴을 찌뿌리고 있지만 담배를 치울 생각은 없어 보인다.

담배를 치워 줄 두 손은 장우산을 거꾸로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왼손과 오른손의 코킹으로 오른 어깨위로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더니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시원하게 스윙한다.

!’

주차장 구석 판넬을 우산 손잡이가 때린다.

바라보던 나보다도 본인이 더 깜짝 놀란다. 그제야 눈을 괴롭히던 담배를 데려갈 손이 자유로와 진다.

 

 

연습장에 도착하여 몸을 풀고 있으니 옆 타석에 낯선 남자가 부스럭거리며 백을 푼다.

처음보는 얼굴이다. 온풍기를 켜며 슬쩍 백을 스캔해 본다.

스크래치가 좀 있는 복스바겐 캐디백에서 그라파이트 아이언을 꺼낸다.

아버지? 아니 직장의 상사가 본인에게 싱글을 가져다 준 아직 현역이라며 넘겨준 무기일 것이다.

... 오늘은 갑자기 공이 나한테 튈 수도 있겠는데?’

섣부른 걱정은 그만하라는 듯 조용히 똑딱이를 시작하는 그를 보며 내심 멋쩍어 빈 스윙으로 몸을 풀어본다.

20분정도가 지나 그의 코치가 타석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듯한 평온한 표정으로 볼록거울에 두 번의 다운스윙을 꽂았으며, 우측 발사각 75도의 드라이버 샷으로 짐짓 자신을 깐히 본 것 다 알고 있다는 경고성 스윙을 선보였다.

살기없는 암살기는 코치가 나타나 그의 드라이버를 봉인하면서 간신히 거두어 지었다.

레슨이 끝나고 프로와 함께 떠나간 그분의 물길 같은 옷자락을 잡으려는 간절한 몸부림을 말리듯 더이상 볼이 올라오지 않자 망연자실하게 핸드폰을 열어 오늘 하루 몇 번이나 열었을 당근 어플을 불러내는 그를 보며 혹시 점심때 스치듯 지나친 그 어린양이 아닐까 생각하며 백을 정리했다.

 

 

양손 가득 장본 비닐봉지를 들고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밖에서 뛰어오는 발소리를 듣고 얼른 열림 버튼을 누른다.

아고. 감사합니다. 여보 빨리와~’

뒤따른 아이와 아빠가 눈인사로 고마움을 표한다.

구석으로 밀려난 나는 부부의 대화를 피할 곳이 없다.

이번주에 어디가?’

. 운동 약속있어

?’

아이 팀장님이 오라는데 어떻게 해

참 요즘 살맛났어 아주?’

내가 또 따올게. 이번 주말 저녁 외식 콜?’

남자가 쓰고 있는 모자 뒤편의 필기체의 타이를리스트 로고와 거울반대편으로 보이는 pxz 점퍼, 비에 젖어 뽀도독 거리는 쥐포어 신발이 눈에 들어올 때 올라가시라는 인사와 함께 아래층 가족이 내린다.

급 조용해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자는 지나던 창밖 청보리밭을 보며 새로 생긴 골프장인가 눈이 휘둥그레지던 과거의 자신이 생각나 괜스레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추천 47 반대 0

댓글목록

작성일

새벽에 웃으면서 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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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역쉬 골포 최고의 필력가, ujison님 !
오늘도 재밌게 보았습니다.
새해에도 많이 부탁드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 0
작성일

좋은글 잘봤습니다
일상에서 볼수있는 골퍼들..
“75도 드라이버샷…” ㅎㅎㅎㅎ

    1 0
작성일

감사합니다 예전 인터넷 소설의 향수를 느끼게 해주시네요~

    1 0
작성일

ㅋㅋ 재밌게 잘 봤습니다

    1 0
작성일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1 0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 괜스레 2편을 찾게되네요 ^^

    1 0
작성일

마트 장우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쾅'
ㅋㅋ 아침부터 너무 웃었습니다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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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역시 !! 충청방의 베르나르베르베르입니다 !!

    1 0
작성일

뛰어난 필력을 갖고 계십니다.

    1 0
작성일

글솜씨가 대단하시네요.. 몰입하고 상상하면서 읽었네요~~ ㅎㅎ

    1 0
작성일

캬.............ㅎㅎㅎ 재미있게 읽었습니당. ㅎㅎㅎ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너무 재미있어용

    1 0
작성일

에세이 작가 데뷔하셔도 되겠어요 재밌게 잘봤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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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내 얘기 같아서 정독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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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여기에 노벨문학상 후보님 글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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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청보리밭 ㅋㅋ 도심 잔디밭을 바라보며 살짝 에이밍해보며 어깨 정렬하던 아저씨도 있었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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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ㅎㅎ

    1 0
작성일

와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1 0
작성일

와... 어마어마한 필력이시네요. 시중에 왠만한 클리셰를 모두 모아 숨도쉬지 못하게 몰아치시는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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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캬.. 이런거야말로 재능이시네요 bb

    1 0
작성일

와우 오랜만에 설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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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훌륭한 에세이네요! 수필집 하나 내셔도 되겠어요!
잘 읽고 갑니다~

    1 0
작성일

살기없는 암살기...ㅋㅋㅋ
대단한 필력입니다.

    1 0
작성일

이제야 보네요. 멋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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